노래 ‘처녀뱃사공’의 내력과 의미
노래 ‘처녀뱃사공’의 내력과 의미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6.07.29 11:19
  • 호수 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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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이 1934년에 발표한 노래 중에는 ‘오대강 타령’(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 국토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개의 강을 노래로 만들었는데요. 각절 두 줄씩, 도합 5절 가사로 이뤄진 노랫말에는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노들강(한강), 낙동강이 담겨져 있지요. 한반도의 북, 동, 서, 중, 남을 흐르고 있는 강인데,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삶에서 진정한 젖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서 낙동강에 해당되는 5절 가사를 더듬어 봅니다. ‘남쪽은 낙동강 곡식 실러 가는 물/ 이 쌀을 실어다가 님께 드리리’로 표현된 노래 가사는 영남 일대 너른 들과 낙동강의 필연적 관계를 담아내고 있네요. 근년에 출현한 ‘4대 강’이란 말은 분단 이후 수자원의 효과적 관리를 위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남쪽의 강만을 가리키는 말이니 ‘오대강’에 비해 한결 축소된 분류이고 또 정치적 목적이 담겨진 말입니다. 오늘은 옛 신민요 ‘오대강 타령’에 나오는 낙동강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조금 풀어볼까 합니다.
예로부터 낙수(洛水)라고도 일컫던 낙동강 명칭에는 가락국(駕洛國)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의 함백산(咸白山)에서 발원해 영남의 중간지역 낮은 땅을 두루 굽이굽이 감돌아 남해로 흘러드는 도도한 흐름의 강입니다. 우리나라 강 가운데 세 번째로 긴 강이기도 합니다. 가야와 신라 천 년, 임진왜란에서 6‧25전쟁의 역사적 애환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낙동강은 오늘도 묵묵히 흘러갑니다.
1950년대 중반, ‘부길부길쇼’란 이름의 유랑극단 운영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한 대중음악인이 있었습니다. 그 일행들은 경남 함안의 악양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장으로 옮겨가기 위해 낙동강에 이르러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그런데 노 젓는 사공이 뜻밖에도 20대 처녀였네요? 악극단대표는 처녀뱃사공에게 내력을 물었는데 오라비가 군에 입대했고, 두 여동생이 번갈아가며 오빠가 하던 힘든 뱃사공 일을 계속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는 애틋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찡해진 극단대표는 이 사연을 가슴에 오래 담아두고 있다가 기어이 가요작품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체 한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 ‘처녀뱃사공’(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입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그 악극단대표가 누구냐면 바로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천재적 대중예술가 윤부길(尹富吉, 1912~1957)입니다. 한국 최초의 개그맨으로도 불리는 그는 작사, 작곡, 연주, 시나리오 집필, 희극배우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기량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워낙 전쟁 끝의 험한 시절이라 극장공연만으로는 생계를 잇기 힘들었고, 악극단을 꾸려서 전국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며 그날그날의 삶을 연명해갔습니다.
윤부길의 아내 고향선(본명 성경자)은 비록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로 성장했지만 유랑연예인 남편을 만나 무명의 악극배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윤항기, 윤복희)이 태어났지만 늘 남의 집에 맡겨두고 어쩌다 겨우 만날 뿐 부모노릇을 제대로 해낼 도리가 없었지요. 이런 고난 속에서 윤부길은 고질적 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해 파란과 굴곡을 겪다가 마침내 45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마저도 악극단을 따라 떠돌다가 병을 얻어 동해안 묵호에서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낯선 강원도 묵호의 산언덕 황토구덩이에 윤복희 어머니가 묻히던 날, 악극단 동료단원들은 나팔과 북으로 슬픈 곡을 연주하며 마지막 길을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흐릿한 흑백실루엣에 담긴 그날의 사진 한 장은 삶의 벼랑 끝에 서있던 1950년대 전체 한국인들의 처연하고 가파르던 심정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오누이의 애달픈 생애는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펼쳐지고 있었던 지도 모릅니다. 노래 ‘처녀뱃사공’ 중 우리의 가슴을 오래 짠하게 하는 대목은 오라비가 군에 가고 없는 농촌의 가정에서 늙은 부모를 자신이 모시겠다고 말하는 처녀뱃사공의 다짐입니다. 하지만 역시 앳된 처녀인지라 자신의 혼례이야기만 듣고도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광경은 진정 아름다운 한 폭의 한국화(韓國畵)라 하겠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처녀 몸으로 힘겹게 가장 역할을 도맡아가며 노부모까지 봉양하고 있는 갸륵한 미혼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서 가수 황정자가 구성지게 엮어가는 ‘처녀뱃사공’ 노래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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