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통해 지난 삶을 회고하면 행복을 느끼게 돼요”
“고전을 통해 지난 삶을 회고하면 행복을 느끼게 돼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8.05 11:32
  • 호수 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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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고전의 대중화… 눈 어두운 노인 위해 ‘읽어주는 고전’ 등 앱 개발
중국·베트남·몽골 등지에 한글백일장 개최… 한글 세계화에도 앞장

무더위를 잊은 곳이 있다. 서울 구기동의 한국고전번역원. 150여명의 직원들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번역하느라 날씨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한문고전을 수집․정리․번역하는 교육부 산하 학술기관인 이곳에서 최근 ‘고구마’란 앱을 개발했다. ‘고전에서 구하는 마법 같은 지혜’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반응도 아주 좋다.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어서다. 특히 눈이 어두워 책 보기 힘든 노인에게 딱이다. 예쁜 성우 목소리로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어준다. ‘고구마’ 앱을 개발한 이명학(61) 한국고전번역원장을 만나 고전의 가치와 고전 속 노인의 모습 등을 들었다.

-‘고구마’라는 이름부터 재밌다.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고전 앱이에요.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고구마’란 배너가 있어요. 고전 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이나 웹툰, 그림엽서 등 시각자료로 만들어 놨어요. 그 중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든 ‘읽어주는 고전’은 켜놓고 듣기만 하면 돼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금 생소하다. 그간 해온 일들은.
“신라 최치원의 ‘계원필경집’을 비롯해 구한말 황현의 ‘매천집’ 등 개인 문집을 번역 간행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을 번역하고 있어요. 고전번역 전문인력 양성도 하고요.”
-승정원일기는 어떤 기록인가.
“조선시대 청와대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왕을 중심으로 매일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 중요한 자료입니다. 인조 원년부터 순종 4년까지 288년간의 기록으로 총 글자 수가 2억 4259만자에요. 조선왕조실록 5200만자, 팔만대장경 5000만 자와 비교가 안 되지요.”
-승정원일기 중 주요 대목을 소개해 달라.
“이순신 장군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의 진위에 대해 논란이 있지요. ‘승정원일기’에 이원익이 ‘왜란 때 이순신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 이예가 아버지를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예는 일부러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라고 인조에게 아뢴 것을 보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왕명에 신하가 토를 달기도 했다는데.
“조선시대 간통은 중대한 사안이었어요. 성종 20년(1489년)에 사헌부가 성종에게 10여년 전 있었던 정은부 간통사건을 보고합니다. 모녀가 각각 간통을 저지른 겁니다. 정은부의 장모 공씨가 남편의 친조카와 간통하고 아내는 남편의 친척동생과 간통한 사건입니다. 아내는 간통 사실을 시인해 처벌을 받았지만 장모 공씨의 경우는 소문만 무성하고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았어요. 공씨를 처벌하지 말라는 성종과 조사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견해가 충돌돼 일주일을 끌면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결국에는 공씨가 죽는 바람에 조사가 중단됩니다. 왕의 명령이 먹히지 않은 경우이지요.”
-기록을 고치거나 삭제가 불가능했다고.
“예외가 있어요. 1776년 2월, 당시 왕세손인 정조가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영조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일을 승정원일기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일에 대해 정조 자신이 인정의 궁극에서 비롯된 애통함으로 가득하고, 다른 책에도 기록을 해놓아 굳이 승정원일기에까지 남길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유를 댔어요. 영조는 손자의 눈물겨운 상소에 감동 받고 지우라고 명했고, 그에 따라 승지 한 사람과 주서 한 사람이 함께 창의문 밖 차일암에 나가서 지웠습니다.”
-노인에게 고전은 어떤 점에서 좋은가.
“고전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보편적 윤리, 가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겁니다. 사람답게 사는 게 어떤 것인가, 사람의 도리가 무언가를 고전을 통해 반추할 수 있지요. 고전을 읽으며 지나온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그런 가운데 정신적인 여유와 행복도 느끼리라 생각해요.”

이명학 원장은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 한문교육과를 나와 베이징사범대 대학원 중어중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대 교수이며 사범대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고전만 들고파는 평범한 한문학자가 아니다. 2007년 중국 북경에서 ‘성균한글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한글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백일장 초창기에 예산이 부족해 자비를 들이기도 했다. 또 ‘소년어사 출두요’라는 타이틀의 효 애니메이션 CD를 자비로 제작해 전국 6700여곳의 초등학교에 무료로 배포했으며, 모교인 중동고에 장학금 10억원을 기탁했다. 2014년 임기 3년의 한국고전번역원장으로 취임해 고전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2005) ‘한자와 한문의 세계’(2004) 등이 있다. ‘한자와…’는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소년어사 출두요’ CD엔 무슨 내용을 담았나.
“신의와 효를 잘 실천하는 백성을 찾아 표창하라는 임금님의 명을 받고 차봉석이란 암행어사가 길을 떠납니다. 어느 마을에 밤마다 골목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요. 어사가 골목을 지키고 섰다가 이유를 알아냈어요. 아들이 앞이 안 보이는 어머니에게 동네 바람을 쐬게 하려고 수레에 태우고 끌고 다니는 소리였던 겁니다.”
-감동적인 효 실천 장면이다.
“과거에는 효가 실천덕목 중 하나이고 그걸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사회가 아니에요. 요즘 삼강오륜의 효를 효라고 여기는 이는 드물어요.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들에게 ‘배려’를 가르쳐야 해요.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게 현대의 효입니다.”
-중국에서 한글백일장을 시작한 것도 신선하다.
“북경에서 2007년 처음 열었고,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베트남 ․몽골 등지에서도 백일장을 개최했어요. 1~3등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할 기회를 줍니다. 올해는 중국 북경에서 57개교, 93명의 학생들이 참가했고, 그 가운데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글을 쓴 북경대 여학생이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중국의 대학 한국어학과에서 처음엔 우리말 회화만 가르치다가 이 백일장이 생기면서 글쓰기 수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어요.”
-조선시대 노인우대 정책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
“70세 이상의 문신에게 기로연, 일반백성에겐 양로연을 베풀어 위로해주고, 80세 이상에게는 양반․천인을 막론하고 ‘노인직’을 하사했어요. 100세까지 살기를 기원하며 ‘궤장’이라고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기도 했고요.”
-노환에 시달리는 건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조선의 선비들이 와병 중에 쓴 시가 있어요. 그걸 모아 이달 안으로 ‘병중사색’이라는 책을 낼 겁니다. 대부분 병을 극복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병과 친해지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고려 때 문신 이규보는 백내장으로 고생하지만 그가 병중에 쓴 시에는 하늘에 맡기고 체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고전은.
“제가 한문단편소설을 전공했어요. ‘검녀’라는 소설은 여자검객이 주인공이에요. 이 여자가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나면서 ‘다시는 남자를 위해 바느질과 밥을 짓지 않겠다’는 말을 남깁니다. 조선시대에 굉장한 파격이지요.”
-세상이 ‘김영란법’으로 떠들썩하다.
“한국사회는 인정의 사회에요. 그동안 인정이 관행처럼 용인돼 왔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되고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춘추좌전에 나오는 ‘사구모신’(舍舊謀新․구태를 버리고 새로운 일을 꾀한다)이란 말이 법 취지에 꼭 들어맞는 거 같네요.”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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