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에 두 작품 동시 연재… 전무후무한 일이죠”
“일간스포츠에 두 작품 동시 연재… 전무후무한 일이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8.12 15:03
  • 호수 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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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 쓴 추리작가 김성종

“나이 들수록 더 교활해지고 더 영리해지고 더 세부적이 돼가”
해운대에 추리문학관 짓고 창작교실 운영 외에 창작에만 전념

‘여명의 눈동자’가 부활했다. 정진우 영화감독이 현재 구슬땀을 흘리며 동명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채시라․최재성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나눈 불멸의 키스 신을 스크린에서도 볼 기회가 생겼다. 물론 역할은 다른 배우들이 맡는다. 처음 일간스포츠에 연재됐을 때가 1975년이었고 MBC가 대하드라마로 선보인 게 1991년이니까 이번 영화까지 포함하면 무려 40년간 ‘눈동자’를 뜨고 있는 셈이다. 원작 소설을 쓴 김성종(75) 추리작가를 부산 해운대에서 만났다. 보름간의 일본여행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다.

-해마다 일본여행을 간다고.
“최근 ‘후쿠오카 살인’이라는 책을 냈고, 다음에 낼 책이 ‘오사카 살인’이에요. 자료수집과 현지답사 겸해서 자주 일본을 갑니다.”
-‘여명의 눈동자’는 어떻게 쓰게 됐나.
“40여년 전 일간스포츠에 6년간 연재했어요. 당시만 해도 부분적으로 건드리기는 했지만 일제-해방-6․25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정통으로 뚫고 간 작품이 없었어요. 정말 소설 감인데 말이지요. 그게 늘 아쉬웠어요. 능력도 없이 시작했지만 반응이 좋았어요. ‘여명의 눈동자’는 스파이 마타하리의 암호에요.”
-연재 때에도 반응이 좋았는지.
“당시 한국일보 장강재 사장이 절 불러 ‘하나 더 하자’고 그래요. 하나 쓰기도 힘든데다 같은 작가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도 곤란하다니까 장 사장이 ‘가명으로 하자’며 작가 이름까지 지어주었어요. 가을 ‘추’자에 정치 ‘정’자 ‘추정’이라고요. ‘제5열’이란 작품으로 1년 반 연재했어요. 한 신문에 내용도 스타일도 완전히 다르게 나갔어요. 독자 반응이 안 좋았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테지요. 신문소설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요즘 다시 영화로 찍는다고.
“재밌는 얘기가 있어요. 원래는 드라마하기 전 정진우 감독과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계약을 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런데 두 번 모두 정 감독의 개인사정으로 영화를 만들지 못했어요. 저는 계약금만 챙긴 셈이지요(웃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정진우 주간’을 했어요. 정 감독이 절 불러 ‘눈 감기 전에 (여명의 눈동자 영화화) 꼭 하겠다’며 만들다만 필름을 보여주더라고요. 일본군이 남경에 쳐들어가는 장면이에요. 저도 그때 처음 봤어요. 그리고 지난봄에 정 감독과 계약을 했어요. 지금 한창 찍고 있을 겁니다.”
-한국 문학사에도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제가 추리소설을 쓰기 때문인지 ‘여명의 눈동자’를 김성종의 대표적인 추리소설이라는 이도 있어요. 문학평론가들은 순수문학의 범주에 넣기를 주저하는 분위기도 있고요. 영국의 아가서 크리스티의 작품, 해리 포터 같은 소설이 영국문학의 순수성을 훼손했는가 묻고 싶어요. 그 소설들은 영국소설을 더 풍성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추리문학 사정은 어떤가.
“아직도 일천하지요. 추리작가들이 몇몇 있지만 펴낸 책들이 빛을 보지 못해 주저앉고 말아요. 과거엔 스포츠신문이 추리작가 등용문 역할을 했지만 요즘은 그나마 사라지고 없어요. 외국처럼 작품을 쓰면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고 히트하는 선순환 구조가 돼야 해요. 추리작가협회에서 펴내는 계간지 ‘미스테리’가 나오긴 합니다만.”

▲ 추리문학관 1층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 읽기에 좋은 공간이다.

김성종 작가는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에 갔을 때 산둥성 지난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서울에 들어왔다가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 전쟁이 끝나고 전남 구례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진학’․‘여성중앙’ 등에서 잡지기자를 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찰관’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장편소설 공모에 ‘최후의 증인’이 당선돼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총 50여편의 장편 추리소설과 ‘여명의 눈동자’ 등 10권의 장편소설을 냈다. 1992년엔 해운대에 추리문학관을 설립했다.

-부산엔 어떻게 내려왔나.
“서울이 싫어 고향이나 다름없는 구례에 들어가려고 했어요. 40대의 혈기왕성한 때 시골에 도 닦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추리작가에게 조용한 환경이 맞지도 않아 포기했어요. 그 무렵 부산의 한 신문에 연재를 하는 관계로 부산을 왔다 갔다 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적당히 퇴폐적이고 인구도 많고 범죄도 많고 미스테리한 분위기 등이 추리작가에게는 딱 맞는 도시였어요.”
-국내 유일 추리문학관을 운영 중이다.
“일본의 추리작가들이 와서 보고는 자기네도 이런 문학관이 없다고 해요. 추리작가 1000명의 나라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추리문학관은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500여평의 전문도서관이다. 1층은 카페이고 2․3층에 일반도서와 추리소설 등 3만 여권의 장서를 구비해놓았다. 매주 목요일 일반인을 상대로 추리소설 창작교실을 연다.
-나이가 들면 추리소설 쓰기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저는 아직 차이를 못 느껴요. 글 쓰는 게 즐겁기만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몸은 약해지지만 정신은 더 교활해지고 더 영리해지고 더 세부적이 돼 가는 걸 느껴요.”
-우리나라는 ‘작가 수명’이 짧은 것 같다.
“제 또래의 소설 쓰는 이들이 거의 없어요. 이문구는 벌써 떠났고, 김승옥은 말을 못하는 상태이고, 이청준은 몇 년 전에 떠났어요. 부산의 동갑내기 작가는 문밖 출입조차 안해요.”
-노인에게 글쓰기가 좋은가.
“우리나라 노인들은 책을 참 안 읽어요. 제가 지하철 경로석에 앉아 책을 들고 있으면 별 희한한 사람 다 본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봐요. 일본은 안 그래요. 문학을 좋아하는 국민이에요. 책을 많이 보고 메모도 많이 합니다. 조그만 모임에서도 책 한권씩 나와요. 인간의 사고는 생겼다 변화하고 그러지요. 그걸 언어화하면 정리가 되고 치매 예방에도 좋아요.”
-외국의 작가 중 누구를 좋아하는가.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쓴 존 르 카레, ‘오뎃사 파일’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드 등이에요. 젊었을 때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등을 읽고 습작을 시작했어요.”
-인생은 어떻다는 생각이 드나.
“인생에는 패턴이 없어요. 동물은 옷이나 집, 교육이 필요 없지만 인간은 모든 걸 갖추어야 해요.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가족까지 부양해야 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사는 가치가 있는가 회의가 들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 땀을 흘리는 자체가 의미가 있어요.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가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처럼 인생은 허무하고 무의미한지를 알면서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라고 봐요.”
-작품마다 히트를 했다. 인세가 꾸준히 들어오나.
“그런 건 없어요. ‘최후의 증인’으로 200만원 받은 걸로 당시 화곡동에 집 사고 남은 돈으로 (34세에)장가갔어요. 여명의 눈동자 쓰면서 원고료 수입으로 먹고살 만해 직장 때려치우고 지금까지 전업 작가로 온 겁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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