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호철의 못 이룬 마지막 소원
작가 이호철의 못 이룬 마지막 소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09.23 13:36
  • 호수 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가 황순원, 민관식 전 장관처럼 자다가 죽고 싶어”

시니어신문 ‘백세시대’는 ‘인물 포커스’란 타이틀로 신문 한 면을 할애해 사회저명인사들의 심층 인터뷰를 내보낸다. 그동안 지면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하나둘씩 운명을 달리하는 걸 보면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멀게는 채명신 장군부터 가깝게는 코미디언 구봉서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3,4명이 세상을 뜬다. 지난 9월 18일, 85세로 타계한 ‘한국 분단문학의 큰별’ 소설가 이호철 선생도 2년 전 백세시대 지면에 등장했었다.
고인과 관련해서는 잊혀지지 않는 사사로운 일이 있다. 신문이 발간되면 바로 인터뷰에 응한 인사에게 신문을 우편 발송한다. 고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문이 도착할 날짜가 지났는데도 받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대부분은 연락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고인은 편집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와 신문을 언제 받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인의 경력 정도라면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을 것이고 내용도 빤할 것이니 관심이 없을 것으로 알았다. 의외였다. 결국 다시 고인의 집으로 신문을 보냈고 나중에 신문을 잘 받았고 고맙다는 대답도 들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삶에 대한 애착이 많은 분이라는 걸 느꼈다.
고인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1950년 7월 원산고 3학년 재학 중 인민군에 동원돼 경북 울진까지 남하했다. 전세가 뒤바뀌어 북진하는 국군에게 강원도 양양에서 붙잡혔다. 포로행렬에서 만난 작은 자형이 헌병에게 부탁해 겨우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갔지만 그해 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원자폭탄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걸 피하기 위해 월남했다.
원산 선착장에서 미군의 LST(상륙수송선)에 몸을 실어 부산에 도착한 이후 부두노동자, 제면소 직원, 미군부대 경비원 등 힘겨운 피난생활을 했다. 피난 와중에도 일본판 에세이집을 품에 넣고 다니며 읽을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다. 부두에서 노동일을 하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실향민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죽음을 묘사한 체험적 단편소설 ‘탈향’으로 작가 황순원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현대문학상 신인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해 쟁쟁한 신진작가로 군림하기도 했다.
염무웅(75) 문학평론가는 “한 개인이 경험한 삶은 비록 고통에 가득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섬세하고 충실하게 그려낸 문학은 만인에게 고통의 극복을 선사한다는 이유에서 그의 문학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생전의 고인은 기자에게 통일과 관련해 “통일은 멀어요. 당장 되더라도 문제가 있고요. 북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일시에 몰려오면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중국이나 일본으로도 갈 텐데 그들 나라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통일을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으로 보면 너무 무거워요. 남북이 오고가고 권력은 비켜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해요. 면회소 설치가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5곳 정도 설치해 그곳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나고 그쪽에 돈, 편지도 보내면 어떻게든 굴러갈 겁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때부터 다른 거 복잡하게 하지 말고 면회소 이거 하나만이라도 설치했어야 했어요”라고 덧붙였다.
고인에게 “북한 내부에선 왜 김정은 제거 같은 정변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자 “제가 해방 후부터 전쟁 나기 전까지 5년간 공산주의를 체험했잖아요. 엄두도 못 낼 일이지요. 박정희 권력이 무섭다고 하지만 거기는 그보다 5만배는 더한 곳입니다. 감옥 안이 세상 밖보다 살기 편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고인의 부음을 접하고 한 가지 아쉬운 건 평소 원하던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기자에게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이나 소설가 황순원 선생처럼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올해 6월 뇌종양판정을 받은 뒤 병세가 악화돼 3개월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