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안보이면 볼 수 있는 것들
글씨가 안보이면 볼 수 있는 것들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6.11.04 13:44
  • 호수 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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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따라 시력이 달라지니, 고령사회에 맞는 명함이 절실하다. 이런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기존의 명함을 그대로 쓰는 회사들이야 좀 불편하겠지만, 뭐가 보여야 이름을 알아먹고 뭐가 읽혀야 회사전화번호도 알 것 아니냐!
요즘 명함을 받으면 전에 없이 팔이 아프다. 눈앞에서도 잘만 보이던 명함글씨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멀어져야 보이니 말이다. 인간의 눈이란 것이 본래는 앞에 있는 것은 잘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거늘, 인생중반에 들어서면 어느덧 현상은 곧 역전된다.
글씨를 보려하거나 카카오톡이나 문자를 보려면 미간을 찌푸리고 팔을 쭉 뻗어 종이나 휴대폰을 점차 멀리 가져가야 비로소 보인다. 멀어야 보이고, 가까우면 찌푸린다. 사랑이야 눈멀어야 가까이 볼 수 있겠지만, 노안은 멀어야 가까이 볼 수 있다.
이제 잘 보이는 것이라고는 움직이는 사람들, 특히 눈앞에서 알짱대던 어린아이들이 눈에 쏙 들어온다. 한참 애들을 키울 때는 보이지도 않던 걸음마 아기들의 신발모양이 보이고, 지나가는 청소년들의 긴 머리에 꽂힌 똑딱핀이 눈에 보인다. 보이지 않았던 아내 귀밑 점이 보이고, 아들의 희끗해진 옆머리가 보인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가까이 보인다.
글씨가 안보이면 사람이 보인다.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글씨는 별 관심이 없어지기도 하고, 글씨가 나를 밀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글자 앞에서는 점점 침침해지고 새로운 정보 앞에서도 점점 깜깜해진다. 밀려나는 것 같기도 하고 도태되는 것 같기도 한 변화를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는 말이다.
우리가 글씨와 정보 앞에서는 점점 까막눈이 되어가지만, 사람과 사랑 앞에서는 점점 큰 눈을 뜨게 되는 경험을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사회 앞에 인공지능이 우리와 대화를 하며 우리의 정신건강을 돕는 시절이 오고 있다지만, 그저 버튼이나 누를 뿐이지 그 원리를 그 비결을 알리 만무하다. 다만, 사람은 점점 잘 보인다. 선인과 악인이 구분이 되고, 덕이 있는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며, 결국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깨닫게 된다. 아이의 맹목적인 발걸음이 보이고, 공부 못하는 초등생 손자의 착한 마음씨가 보인다. 속 썩이던 둘째 아들이 늘 내 위로가 된다는 것도 육안이 약해질 때가 되어서 알게 되는 일이다.
약함은 우리의 다른 쪽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눈만 침침할 뿐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귀도 멍멍해질 가능성이 높다. 눈과 귀만 그러면 나으련만, 다리도 아프고 장기도 하나씩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이 약해지면 사랑을 보게 된다는 이 역설에서 희망을 얻어 보자. 귀가 안 들리면 상대의 입을 더욱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한 번도 자세히 본적이 없었던 아이들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자세히 보고 더 자세히 그의 말을 읽어내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살아오며 우리는 처음으로 아이들의 얼굴과 표정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다리가 아파야 고은 시인의 시구가 들린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장기가 하나씩 약해지면서 우리는 심장의 위치를, 쓸개의 기능을, 소장의 크기를, 그리고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비로소 하나씩 깨우친다.
잃는 것이 우리를 알게 하고, 약해지는 것이 우리는 지혜롭게 한다. 죽어야 살아나는 이 역설은 참으로 종교 같다. 약해지는 것의 고통,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되는 통찰과 발견의 기쁨, 우리는 둘 중 어떤 것에 무게를 둬야할까. 잃어버린 것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의 빈자리에 허탈이 아닌 지혜와 발견이 채워진다면, 고통이 우리인생의 보완제요, 약함이 우리 삶의 대체재라 할 만하다.
잃는 것, 약해진 것은 그냥 보내자. 내가 잡지 못할 세월의 연인은 보내고, 이제 약함과 상실이 내게 준 일생의 소득을 끌어 안아보자. 약해서 기쁘고, 잃어서 행복한 사람의 힘찬 발견과 기쁨의 탄성을 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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