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코미디언 남보원 “국민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드리나… 그 일에만 매달렸어요”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 “국민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드리나… 그 일에만 매달렸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11.11 13:52
  • 호수 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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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세 현역… 지역 축제, 사찰 행사 혼자서 60분간 진행할 만큼 건강
일본천황 항복발표‧이승만 연설 등 성대모사… “내 쇼는 다큐멘터리”

‘우리나라 주부들이 가장 원하는 남편감은 송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 나이(90)에도 집에 있지 않고 돈을 벌어와서다. 송해 못지않은 이가 원로 코미디어 남보원(79‧김덕용)이다. 최근 장흥‧보성‧통영 등지로 공연을 다녀왔고 조만간 의성에도 갈 예정이다. 지난 10월 27일, 영화배우 남궁원‧김지미 등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는 ‘2016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아파트에서 매니저 역할을 하는 부인 주길자(70)씨와 단둘이 지내는 그에게서 ‘50년 원맨쇼 에피소드’를 들었다.

-여전히 활동한다니 놀랍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 지방을 다니며 공연합니다. 지역축제나 사찰행사, 노인대학 같은 데서 꾸준히 불러줘요.”
-반응은 어떤가.
“그때 그 시절 얘기를 들려줄 사람이 송해 선생하고 저밖에 더 있나요.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하시죠.”
-은관문화훈장 수상을 축하한다.
“1997년 화관문화훈장에 이어 두 번째에요. (최순실 게이트를 빗대)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웃음배달부로 50여년을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재밌게 해드리나 그것만 연구하며 살아왔어요. 그래서 상을 주신 것 같아요.”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다.
“이 상을 받기까지 저에겐 세명의 여자가 있어요. 저를 남쪽으로 데려다 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남보원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큰 정미소를 운영한 지주였다. 해방되자 친일파로 낙인찍힌 아버지는 혼자 남으로 피신했다. 남보원은 1‧4후퇴 때 어머니와 대동강을 건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남보원은 “키가 작아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허리를 펴라, 오그리면 죽는다’며 내 손을 꽉 쥐었다. 나중에 손이 저려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부인이 매니저 역할을 한다고.
“전화 받고 스케줄 조정하고 운전도 해주는 아내의 도움이 큽니다. 딸은 속 썩이지 않고 잘 성장해준 것이 고맙고요.”
-‘원맨쇼’는 어떻게 시작됐나.
“젊었을 적에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아나운서, 성우 되려고 시험도 보고 가수가 되려고 노래자랑에도 나가봤지만 다 안됐어요. 그러던 중 안면이 있는 쇼 단장(김헌주)의 소개로 우연히 시민회관 무대에 서게 됐어요. 서영춘씨가 사회를 보는 무대였는데 일면식도 없는 저를 소개하기 싫다고 해 제 발로 걸어 나가야했지요. 거기서 팔도사투리, 성대모사 등 비축해놓은 장기를 쏟아내고 들어갔더니 관객들이 ‘야 다시 나와!’하면서 열광했어요. 첫무대에서 출연료 5백환을 받아들고 너무 좋아 화장실에 들어가 벽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남보원’이라는 예명이 재밌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는 제가 법관이 되길 희망하셨어요. 동국대 정치학과에 들어갔지만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항상 ‘축구선수가 되려거든 함흥철(1930~2000)처럼 되고 깡패가 되려면 우두머리가 되고 딴따라가 되려면 넘버원이 돼라’고 하셨어요. 거기서 남보원(南寶元), 남쪽에서 제일가는 보배란 뜻의 예명을 만들게 됐어요.”
-성대모사는 타고나야 할 것 같은데.
“어렸을 적에 뭔가를 들으면 흉내 내기를 좋아했어요.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에만 축음기가 있었어요. 배뱅이굿, 양산도 도라지타령 같은 곡들을 수없이 반복해 들었어요. 제가 창, 가요, 외국민요 등을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됐지요.”
-스토리가 있는 성대모사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을 총소리, 포격소리 등을 넣어 표현하고, 연설문을 읽는 일본천황과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고 느리게 말하는 이승만 대통령 등의 음성을 적당히 섞어 우리나라의 격동기 역사를 들려주니까 일종의 다큐멘터리인 셈이지요.”
-새소리·피리소리는 어려울 텐데.
“시골에는 새들이 많잖아요. 부엉새, 소쩍새 등 휘파람을 이용해 냅니다. 어렵지 않아요. 입에다 뭔가를 넣고 하는 속임수라고 생각해 무대 뒤로 와서 내 입을 벌려보는 노인도 있었어요(웃음).”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기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정도에요. 저처럼 전국을 다니며 불러주는 이가 또 있나요. ‘백세인생’이란 노래도 작곡자가 저를 위해 따로 편곡을 해주었을 정도에요. ‘150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통일되기 전에는 못 간다고 전해라’로 가사를 바꿔 불러요.”
-혼자서 모든 걸 다 해야 하는 원맨쇼는 힘들 것 같다.
“가수는 노래 하나가 히트하면 그것만 부르면 되지만 제 경우는 달라요. 극장 무대 바로 아래엔 동네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저보다 먼저 성대모사를 해버려 김을 빼버려요. 새로운 걸 보여주어야 해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어요.”
-원맨쇼가 맥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쓰리보이’ 신선삼이 성대모사에 뛰어났어요. 그런데 저 이후 대를 이을 후배가 없어 걱정이에요. 가끔 하겠다고 오지만 못 버티고 그만 둡니다. 소리를 먼저 배워야 해요. 소리 속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어요.”
-가장 잊지 못할 무대는.
“1985년 남북예술인교환방문단으로 북한에서 백남봉(1939~2010)과 ‘투맨쇼’를 할 때 밤새 연습한 것들을 다 보여줘도 박수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10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나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북한 공연을 묻고는 ‘그 사람들 절대 박수도 안치고 웃지도 않아요. 지금쯤 집에서 이불 쓰고 아, 그놈아들 참 잘하데 이러면서 웃고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가깝게 지낸 동료, 후배라면.
“엄용수가 선배대접을 깎듯이 하고 잘해요. 이주일(1940~2002)과 어느 날 술자리를 했어요. 술을 잔뜩 마신 이주일이 ‘남보원, 너 선배라고 말이야’ 라면서 안 하던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밖에 데리고 나가려는데 이주일이 눈물을 글썽이며 ‘형님, 나 외로워죽겠어’ 그러는 겁니다. 금배지를 달고 국회에 들어갔더니 거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고 그렇다고 코미디 쪽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국회의원이라고 예전과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아 설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었던 기억이 나요.”
-나이가 들면 대사를 잊을 수도 있을 텐데.
“생각했던 것과 다른 걸 무대에서 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뭘 할까 무대 위에서 결정합니다.”
-50년 무대 인생을 되돌아보면.
“인생은 결코 혼자 하는 원맨쇼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내가 하는 성대모사도 그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팔도사투리도 판소리도 모두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 사람들이 갈고 닦아놓은 토대란 게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몇분간의 쇼조차 순전한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데 하물며 긴긴 일생살이야 말하면 뭐하겠어요.”
-인생을 한마디로 한다면.
“인생살이는 노래 같아요. 슬픈 노래도 있고 재밌는 노래도 있고 음담패설이 들어있는 노래도 있고.”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직은 내가 (공연으로서)존재하니까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젊은 시절 연예인축구단 만들어 ‘남 펠레’ 소리 들으며 몸을 너무 세게 굴렸는지 요즘 고관절이 아파요.”
-앞으로의 꿈은.
“100세까지 원맨쇼하고 싶어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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