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주막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주막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6.11.25 13:09
  • 호수 5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것이 변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사라진 것들 중 하나가 주막(酒幕)이 아닌가 합니다. 술집, 식당, 여관 등 세 가지를 하나로 합친 형태라고 보면 좋을 듯한 주막은 대개 시골이나 도시의 장터, 크고 높은 고개 밑의 길목,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지는 갈래 길, 나루터나 광산촌 부근에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주막집 분위기가 왈칵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궂은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펑펑 함박눈 쏟아지는 날, 산길 들길을 오래 걸어서 다리쉼이라도 하고 싶은 때 이런 주막이 앞에 그림처럼 나타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행복하겠습니까? 마침 허기도 느껴지는 시간, 우선 그득히 부은 막걸리 한 사발로 컬컬한 목부터 축이고, 사발에 담긴 김치 한쪽을 우적우적 씹으며 터벅터벅 걸어온 강나루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려봅니다.
일제 때 가요계에는 주막집을 테마로 한 노래들도 제법 적지 않게 나왔습니다. 주막 테마 노래의 원조는 ‘주막의 하룻밤’(강홍식, 1935)일 터이지만, 더욱 험한 세월이었던 1940년으로 접어들면서 ‘번지 없는 주막’(백년설, 1940)과 ‘뻐꾹새 우는 주막’(김봉명, 1940), ‘밤 주막’(계수남, 1940) 등 주막 테마 노래가 잇달아 발표됐습니다. 광복 이후로는 ‘비에 젖은 주막집’(박재홍, 1955), ‘봄비 내리는 주막집’(명국환, 1958), ‘주막 없는 박달재’(박재홍, 1963), ‘인생은 주막’(심현우, 1972) 등으로 이어지는데요. 주막 테마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던 가수로는 단연 박재홍(1924~1989)이 손꼽힙니다.
그의 ‘주막 없는 박달재’, ‘봄비 내리는 주막집’, ‘주막등 길손’, ‘나루터 고향 길’ 등에서 주막 관련 토착정서는 물씬 풍겨납니다. 이 여러 주막 노래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명편(名篇)은 단연 ‘번지 없는 주막’일 것입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던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살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風紙)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일제는 정보정치의 치밀성을 위해 한반도전체의 행정구역 정비에 골몰했습니다. 그것은 지번(地番)이 표시된 주소를 등록하는 호적법 실시로부터 비롯됐지요. 일제가 공포한 조선호적령(朝鮮戶籍令)에 담긴 번지제도의 의도 속에는 식민지 땅의 부동산 수탈과 피지배 민중에 대한 효율적 인력장악이라는 정치적 기획과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요 ‘번지 없는 주막’ 속에는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식의 암묵적 표현이 내포돼 있습니다. 이 노래의 제작담당자였던 태평레코드사 관계자들은 당연히 조선총독부 경찰당국의 호출명령을 받았고, 종로경찰서 고등계로 불려가 모진 문초를 받았습니다. 이 고난의 과정은 ‘나그네 설움’이란 노래를 산출시키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했지요.
창밖에 봄비는 줄곧 내리는데 이제 날이 밝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기나긴 이별을 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은 밤을 새우며 이별의 아픔과 서러움을 서로 위로하며 다독거립니다. 이 노래는 3절 가사가 압권입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정인(情人)은 입술을 피가 터지도록 깨뭅니다. 이에 호응하듯 문풍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빗소리도 마치 이를 악물고 울부짖는 듯하네요. 식민지라는 험난한 시대는 내 고향집에서 편안히 정주할 수 없는 불안세월이었음을 이 노래는 가슴 서늘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경북 성주 출신의 가수 백년설(1914~1980)이 마치 봄바람에 일렁거리는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한 성음으로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습니다. 강풍에도 결코 부러지지 않고 그 바람을 견디는 버들가지는 식민지를 견뎌낸 우리 민족의 강인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버들가지의 외유내강이 느껴지는 창법입니다. 이 혼란한 세상사 속에서 오늘은 한 잔 술을 앞에 놓고 다정한 벗과 마주 앉아 아름다운 노래 ‘번지 없는 주막’을 서너 번쯤 반복해서 불러봐야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