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광대 인생 60년… 덩실 대는 ‘신명’을 이론화해 세계에 알렸어요”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광대 인생 60년… 덩실 대는 ‘신명’을 이론화해 세계에 알렸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11.25 14:06
  • 호수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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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패 단원에서 사물놀이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변신
“2시간 공연은 기본… 쉬는 것보다 연주해야 재충전 돼”

“광대는 사람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든다.”
‘광대 인생 60년’을 살아온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64)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의 말이다. 실제로 지난 11월 12일, 대한노인회 노인의료나눔재단 천사운동 나눔콘서트 무대에서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장구연주에 감동을 받고 행복감을 느낀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또, 올해 국악계의 최고 영예로운 상 중 하나인 ‘방일영국악상’(23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수년째 전통연희상설공연을 해오는 서울 종로문화센터의 광화문아트홀에서 만나 연희(演戱)에 평생을 바친 예인의 삶을 들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육십갑자라고 데뷔 60년이에요. 대학에서도 퇴임을 앞두고 있고 공식적으로(?) 노인으로 등록될 거고…그런 것들이 맞물리면서 상을 받게 됐다는 생각을 해요. 경연대회는 아니지만 심사위원들이 인정을 해주시고 해서 책임감도 새롭게 느낍니다.”
-장구 실력에 대해 황병기 선생은 ‘신접(神接)의 경지’라고까지 극찬했다.
“무대 위의 연주자는 다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에 접할 정도로 몰입의 경지에 다다르지요. 그것을 수백번, 수천번 한 것에 대해 칭찬해주시는 거라고 봅니다. 부담도 돼요, 신접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웃음).”
-대한노인회 홍보대사로서 자주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태현실(영화배우), 이상용(코미디언) 등과 같이 홍보대사가 됐어요. 제가 노인회 임원들에게도 말씀을 드렸어요. 홍보대사로서의 임무를 더 많이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장구가 노인에게 좋은 악기인가.
“신체적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르신들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최고예요. 민요도 좋고요. 신명은 신체 건강에 좋아요. 의학적으로 엔돌핀이 솟는 순간과 같을 겁니다. 예를 들어 ‘몇 장단 걸어라’고 할 때 걸음새도 보통걸음, 까치걸음 등 종류가 있어요. 몇 가지를 가르쳐주면 집중을 하게 되니까 기억력 감퇴도 사라지고, 아마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국악 하는 이들은 장수하는 편인가.
“장수하지요. 나이에 비해 일반인보다 건강하고 젊어 보입니다. 항상 좋은 쪽으로 느낌을 갖는 게 예인들입니다.”
-장구는 중국에서 처음 만든 악기라고 하는데.
“율곡‧다산 선생의 유교가 중국의 유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구 모양의 악기는 전 세계에 있어요. 고구려 벽화에도 장구 모양의 악기가 보여요. 우리 민족이 받아들여 우리의 신명에 맞게 진화된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어요. 우리의 장구는 채도 울림도 소재도 달라요. 우리는 오동나무를 쓰지만 오동나무가 안 나는 나라도 있고요.”
-사물놀이를 처음 만들었다고.
“1978년 당시 집시법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 꽹과리‧징‧장구‧북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걸 실내로 끌어들인 겁니다. 사물(四物)은 우리 조상이 자연을 상징한 울림을 네 가지 악기로 만든 겁니다. 장구는 비, 징은 바람, 꽹과리는 천둥, 북은 구름이에요.”

▲ 1960년 지방공연 무대에 선 김덕수.

충남 대전 출생의 김 교수는 5세 때 부친 김문학의 대물림으로 남사당 단원이 됐다. 어른 어깨를 타고 맨꼭대기에서 노는 ‘새미’를 비롯해 줄도 타고 땅재주도 하고 풍물도 치는 등 ‘신동’이었다. 나중에는 보부상들과 함께 전국을 걸어 다니며 난장을 텄다. 1964년 남사당패가 해체되면서 유랑생활을 끝내고 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 악기창고에서 자취를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대학에선 도자기과를 선택하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를 창단해 국내외 연주활동에 힘썼다. 1990년, 1998년 두 차례 평양을 다녀왔고 유럽‧미국‧일본 등지에서 초청연주를 가졌다. 1993년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을 설립했다. 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로 부임했다. 2008년 전통연희단체총연합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1959년), 국민훈장 모란장(1995년), 은관문화훈장(2007년) 등 수상. ‘사물놀이 교칙본1‧2‧3’,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1~8권’ 등의 저서가 있다.
-어른 키 꼭대기에 올라서면 무섭지 않았나.
“어른 네댓 명이 층을 쌓으면 그 높이가 10m는 돼요. 무서움도 모르고 그저 재밌었어요. 한번은 그 위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어요”
-줄도 탔다고.
“그럼요.”
-보부상과도 같이 다녔다는데.
“삼성‧현대 등 기업이 세계에 나가면 K팝가수들이 따라가서 공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보부상은 장사를 합니다. 기획총괄을 맡은 보부상의 ‘대방’과 남사당의 ‘화주’가 협의해서 24절기, 팔도를 누빕니다. 아침에 시작하면 솔방울로 밝히는 횃불이 꺼질 때까지 놀아요. 소싸움도 벌어지고 승자가 소를 타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축제였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라면.
“1983년 미국 댈러스의 세계 타악기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갔을 때였어요. 공식적으로 세계 음악계에 꽹과리‧징‧장구‧북을 달랑 들고 첫 도전장을 던진 순간이었지요. 공연이 끝나고 약 10분간 커튼콜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다른 외국팀들은 악기를 싣는 데만 차를 따로 대절했지만 우리는 각자 북과 징 등을 들고서 택시 하나로 음악회까지 함께 타고 다니던 처지였지요.”
-요즘은 공연을 얼마나 하나.
“주말마다 어디선가 공연을 해요.”
-나이 들면서 힘들 텐데.
“아직은 괜찮아요. 사물놀이는 4명이서 2시간이 기본이에요. 다양한 버전이 있지요. 묘한 게 연주를 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연주해야지만 에너지가 재충전됩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연주기법도 달라져요. 30대때는 힘으로 했어요. 몸도 근육질이었고요. 이후로는 호흡에 의해, 기운에 의해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합니다. 몸도 따라서 변해 근육덩어리가 부들부들 연해지더라고요.”
-대학에는 어떤 학생들이 사물놀이를 배우러 오나.
“다양해요. 학생들의 80% 이상은 어릴 적 어디선가 특별한 선생에게 사사를 한 이들이에요.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실력과 비교될 정도예요.”
-사물놀이를 어떻게 학문화 했나.
“우리가 첫 번째로 한 작업이 ‘덩실댄다’는 신명의 원칙, 그것에 의한 호흡법과 그것에 의한 타법, 보법 등에 대한 이론을 개발한 겁니다. 규칙본을 만들어 그것에 따라 교육을 시켰어요. 영문판‧독어판‧러시어판‧일본어판 등 다 있어요. 10년이 걸렸어요.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서양음악 전공자, 우리 집단 속의 우수한 전문적 능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백세시대’ 신문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건강이 허락된다면 앉아 있지 말고 무엇이든 능동적으로 움직이시길 권합니다. 그게 건강에 좋아요. 평생 해온 것을 나눔 활동에 적극 참여하시는 것 그게 바로 ‘나이 값’을 하는 게 아닌가. 그 속에서 즐거움, 행복지수를 찾기를 바랍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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