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음미하는 디카시 산책
명백한 증거
지운다고 없어지니?
감춘다고 숨겨지니?
남은 흔적만 봐도
우린 네 과거를 다 알거든!
정한용(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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갉아 먹힌 흔적이 완연한 저 노란 낙엽 한 장만 보아도 저 한 그루 나무에 기대 살아온 나뭇잎이 한 해를 어찌 살아왔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있다. 그것은 정말이지 지운다고 없어질 수 없는, 감춘다고 숨겨질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므로 과거가 낱낱이 다 들춰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 알 수 있다. 검은 몸체와 샛노란 잎의 저 강렬한 보색의 관계가 검은 것은 더 검게, 노란 것은 더 노랗게 도드라지게 한다. 그리고 숭숭 뚫린 구멍으로 나무의 몸이 다 비친다.
온 마음으로 온 힘으로 한 해를 버텼을 나뭇잎이 겨울 찬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새 눈은 만들어지고 있다. 내 년 봄을 다시 가장 푸르게 싱싱하게 맞이하려는 한 잎의 희망을 나는 이제 막 켜든 한 자루 촛불이라 부른다.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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