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5층탑을 보고
정림사지 5층탑을 보고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12.02 13:48
  • 호수 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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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제의 돌탑

생각지도 않게 갑작스레 부여를 다녀왔다. 일본의 유명작가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의 ‘여행이야기’에 부여의 정림사지 5층탑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서다. 작가는 탑을 본 소감을 이렇게 길게 기록했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되고 제일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5층탑이다. 백촌강 전투에서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괴멸했을 당시에 이미 완공되어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강건하다고 할까, 늠름하고 힘차다고 할까, 그런 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이 탑을 보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작년에는 많은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지만 결국 부여의 이 정림사지 5층탑을 마지막에 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야마모토 겐키치씨로부터 한국의 고대 도시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가보고 싶었던 까닭은, 뭔가 그렇게 변하지 않은 오래된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감정이 그 당시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단지 이 탑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는 일찍이 고려와 몽고가 일본을 침략한 사건을 그린 장편소설 ‘풍도’를 쓰는 등 우리나라에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젊었을 적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소설이란 장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글을 직업적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난 주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여행 고속버스를 탄 건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오래된 아름다움을 보지 않으면 진정되지 않을 감정, 그것과 유사한 감정 때문이었다. 2시간 20여분이 걸려 부여군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때마침 흐린 하늘에서 첫눈이 내렸다. 정림사지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사방이 잔디뿐인 널따란 절터에 탑만 우뚝 서 있었다. 거무스름한 돌 표면에 첫눈이 녹아 스며들어 검푸른 빛을 발했다. 남성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덩치도 컸다(높이 8.8m). 광활한 터에 홀로 서 있었지만 왜소해 보이지도 외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말한 대로 탑은 늠름하고 강건했다. 현란한 기교나 조잡한 장식을 쓰지 않았다. 간결함으로 말하자면 다보탑과 석가탑의 중간쯤 된다. 매끄럽게 쫀 직사각형의 돌판을 세로로 정성껏 쌓아올렸다. 지붕돌은 몸체에 비해 얇아 보였다. 끝이 살짝 하늘 위로 올라가 사비성의 ‘치미’를 닮았다. 치미는 새 꼬리를 말한다. 일본 탑 느낌이 난다. 백제의 장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탑을 만들어놓았으니 당연할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교롭게 아무도 없었다. 세운 날짜(538 ~660년)가 정확하지 않은 이 탑은 휘날리는 눈발을 온몸으로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탑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1500여년의 시간을 견뎌온 침묵의 무게가 어떻게든 느껴질 듯 했다.
이 탑은 정림사란 절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나라의 멸망과 함께 절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이 탑만 살아남았다. 원래의 절 이름도 정림사가 아니다. 이 절터에서 발견한 기와조각에 고려시대 이 절을 정림사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그대로 부르는 것이다. 탑 뒤편 사당 안에 커다란 돌부처가 앉아 있었다.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탑 오른편에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모형으로 복원한 정림사와 터에서 발굴한 기왓장들을 전시해놓았다. 정림사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됐었다. 크기는 동서 62m, 남북 약 120m이다. 이곳에서 정림사지 5층탑이 국보 제9호이며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일정한 비례에 맞춰 제작됐다는 걸 일본인 건축가가 처음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문화해설사로부터 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탑 쪽으로 걸었다. 첫눈이 오는 날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정림사지 5층탑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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