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늙지 않는다
수치심은 늙지 않는다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6.12.16 13:50
  • 호수 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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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사랑에 눈물이 났고, 중년이 되어서는 자식에 눈물이 나며, 나이가 더 들어서는 세월에 눈물이 난다. 별로 맛있는 것도 없고, 딱히 슬플 일도 없는 일상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면 참 아쉽고 창피했던 일들이 도깨비처럼 갑자기 나타나 늙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수치심은 왜 나이 들지 않는가?
부끄러움은 늘 순간으로 그쳤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는 잊고 싶은 것을 어김없이 되새김질한다. 그게 죄책감이던 수치심이건 인간으로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사회적 감정이련만, 다 겪는 그 일이 나의 뇌세포 속에서는 폭탄처럼 터지고, 유탄처럼 가슴에 매번 박힌다. 숨고 싶어도 더뎌진 걸음으로 숨을 곳이 없고, 누구 탓을 하려고 해도 탓할 인간들이 벌써 죽은 경우도 있다. 무슨 놈의 세월이 숨을 곳도, 탓할 사람도 없는 시점까지 나를 몰고 와서는 마지막에는 수치심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한단 말인가! 참으로 잔인하다.
그런데 이 잔인한 수치의 기억은 왜 이리 반복되는가? 더 오래 살아남은 죄인가? 사실 우리도 무단히 노력했다. 수치심, 죄책감 그걸 줄여보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적도 있고, 나를 피해자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선행을 하면 줄어 들려나 해서 착한 일도 해보고 때로는 나보다 덜 잘못한 이들을 더 크게 나무라서 나의 불편한 과거를 가리려고도 해보았다. 가리려고 할수록, 덮으려고 할수록 때가 되면 생일처럼 찾아오는 뼈아픈 감정을 노구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무겁다. 자, 이제 어쩔 건가!
과거를 돌릴 수 없다면 사실 간단한 방법 몇 가지는 있다. 첫째, 더 뻔뻔해지는 것이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면 더 철면피가 되면 된다. 그런데 잘 안 된다. 잘 됐다면 이 글을 이 지점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두 번째로 들어가자. 내 자신을 들들 볶는 거다. 나는 죄인이요,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니 수치심이 지워지는 순간까지 심리의 사포로 박박 문지르는 거다.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다 보면 심리적인 상쇄가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 해본 자는 알겠지만, 상쇄는 고사하고 나만 고사 상태가 된다. 사실 수치심을 지금껏 안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형벌인 내게 이건 너무 잔혹한 일이었다.
그럼 세 번째로 넘어가자. 수치심에서 손을 떼라. 수치심은 어차피 잡으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를 찾아오니 견디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보자. 수치심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순간보다 더 빠르게 수치심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냥 아예 수치심이랑 같이 살아보자. 이 과정을 위해서는 실은 앞서 했던 두 가지를 적절히 가져와야 한다.
즉, 적당히 뻔뻔하고 적당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원래 수치심이라는 것이 나를 후려치는 감정이라, 우리는 늘 묻지마 범죄 피해자처럼 수치심에게 얼굴이 돌아갈 만큼의 뺨을 맞기 마련이다.
다만, 맞을 때 맞더라도 이건 알고 가자. 지난 세월이 죄책감이건, 수치심이건 아니면 그것 둘의 짬뽕이건 간에 내가 수치심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은 더 인간적이라는 것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은 내가 덜 늙었다는 것이다. 더 아파져 고통이 엄습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벽하게 잊게 되고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게 된다. 저절로 완벽하게 이기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누군가를 향해 죄책감을, 어떤 일에 대해 수치심을 아직 느끼고 있다면, 기억하라. 당신은 아직 덜 뻔뻔하고 더 인간적이며, 당신은 아직 덜 늙었고 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점을 말이다.
앞으로도 죄책감과 수치심은 우리를 찾아와 비수처럼 우리의 심장에 가차 없이 내리꽂게 될 것이다. 벌써 30년째, 40년째, 50년째 우리는 매 순간 당하듯 그들에게 당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꺼이 맞아보자. 죄책감을 더 인간적으로, 수치심을 더 사려 깊게 만나보자.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수치심과 종속관계가 끝나고 수평관계로 가게 될 것이다.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홀라당 내어주어라. 죄책감에 대한 공포가 끝나고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수치심아, 죄책감아 와라. 어서 와라. 언제까지 어깨춤만 추게 하려느냐. 더 인간적으로 맞아주마, 더 사려 깊게 만나주마. 이런 마중과 이런 만남으로 우리는 청춘을 얻고 수치심은 힘을 잃으리니, 단언컨대 수치심을 해석하라 그러면 그의 주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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