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을 도망치는 한 자웅의 노루라도 추격하는 듯 알 수 없는 흥분이…
눈앞을 도망치는 한 자웅의 노루라도 추격하는 듯 알 수 없는 흥분이…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6.12.16 13:57
  • 호수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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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15>

할 바를 몰라 몸들이 무겁고 머리 속이 탁하고 알 수 없이 조금들 슬프고 그러면서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들에게 있어서 한 트렁크 속에 두 사람의 세간을 주섬주섬 수습하는 것이 여간 범상한 일이 아니고 신성하고 경건한 경영인 듯——그렇게 그들의 자태들은 유쾌하고 명랑하다느니보다도 무겁고 침통한 것이었다. 세간이래야 급한 판에 알뜰하게 갖출 수는 없었고 몇 벌의 옷가지와 화장품과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책권과 거울 등속이었다.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이외에도 가령 속 잠방이 같은 것——잠방이는 양말이나 구두와는 달라서 눈에 띠이지 않는 것이라 공동으로 쓴댔자 무망한 비밀인 것이다——단 한 짝의 트렁크라 될 수 있는 대로 공동으로 쓸 것을 넣는 것이 피차의 공덕이었다.
“이것두 넣을까.”
미란은 지녔던 돈지갑까지를 트렁크 속에 던진다. 여행권을 사고 난 나머지의 노자가 들어 있는 그 지갑도 말하자면 두 사람 공동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미란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비용의 전부를 세란의 핸드백 속에서 들쳐 낸 것이요, 단주는 현마의 품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결국은 한 줄기에서 나온 같은 돈인 까닭이다. 단주는 현마를 의지하고 미란은 세란을 의지하고 그 세란은 다시 현마에게 붙어서 결국 집안의 세 사람이 모두 현마라는 커다란 나무줄기를 토대로 해서 뻗어 오르고 자라나는 셈이 아니든가. 그 현마의 넓은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서 조그만 계획들이 있고 비밀이 있고 음모가 생겨 나가는 것이 아니든가. 그들 네 사람이 꾸미고 있는 그 한 폭 나무의 그림자와 분위기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야릇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행장이 되었을 때 단주와 미란은 아파트를 나와 마치 산보나 하듯 느릿한 걸음걸이로 백화점을 행했다. 백화점 아래층에 투어리스트 뷰어로가 있는 것이요, 이미 동경으로 가는 항공권을 산 그들은 거기서 비행장으로 가는 자동차를 타면 그만인 것이었다. 시간의 여유를 이용해서 살 것을 더 갖추고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비행장으로 향한 것은 떠날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였다. 기차 편을 버리고 하필 비행 편을 고른 것은 젊은 모험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방비행——처음에는 그 엄청난 생각에 눈이 돌았으나 이미 모험의 첫걸음을 내디딘 그들에게는 그것이 금시 신기한 자극으로 여겨지면서 자기들의 그 기발하고 천재적인 착상이 얼마나 평범한 세상 사람들을 놀래며 현마와 세란의 눈을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때 두려움과 흥분과 자랑으로 마음속이 그득 차지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오름은 확실히 흡연을 하는 이상의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 만약 동방비행에 성공만 한다면 두 사람이 지금껏 두려워하고 주저해 오던 인생의 문도 손쉽게 열 수 있으리라는 짐작이 의식의 등뒤에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행장에 이르러 벌판 한구석에 서서 때마침 신경에서 날아오는 여객기의 은빛 날개를 우러러볼 때 두 사람의 가슴속은 알 수 없이 술렁거렸다.
거리로 나온 현마는 웬만한 찻집과 두 사람이 감직한 곳을 몇 군데 들치고는 그 길로 정거장에 나갔으나 그림자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식당에 들어가 차를 청해 놓고는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맞은편 벽에 걸린 항공우편의 포스터가 눈을 끌었다. 창공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그림이 신선한 생각을 일으키며 홀연히 한 가지 생각을 뙤어 주자 아까 사무실 단주의 책상 서랍 속에서 집어낸 여행 시간표가 또한 바로 항공편의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울러 기억 속에 소생되면서 그 두 가지의 부합이 현마에게 한 줄기 광명을 주었다. 차를 먹은 둥 만 둥 뛰어나가 시간표를 살피니 동방비행의 시간이 바로 임박해 있는 것이다. 두말없이 택시로 비행장을 향했다. 일종의 영감이라고 할까. 눈앞을 도망치는 한 자웅의 노루라도 추격하는 듯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속이 차졌다.
비행기가 착륙한 것과 현마의 자동차가 비행장에 닿은 것이 같은 시각이었다. 차창으로 막 와닿는 비행기의 모양과 잔디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조그만 그림자를 현마가 내다보고 있을 때 단주와 미란은 잔디를 밟으면서 요란한 폭음을 남기며 눈앞에 굴러와 서는 비행기의 육중한 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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