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0년대 최고의 만화가들 모여… 중국 원로만화가와 정기 교류전”
“60~80년대 최고의 만화가들 모여… 중국 원로만화가와 정기 교류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6.12.16 13:59
  • 호수 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영섭 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

순정만화 창시자… ‘봉선이 시리즈’ 등 300종, 1500여권 남겨
새해 시국 풍자 전시회 준비… 노인들 만화 자서전 도전해볼만

“반성할 건 반성하고,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겠다.”
권영섭(77) 한국원로만화가협회 회장이 시국을 풍자하는 만화전시회를 준비하며 하는 말이다. 만화가협회는 내년 1월 6~31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센터에서 ‘대한민국 원로만화가가 역사를 품다’란 제목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우리나라 순정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권 회장은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1995년), 국제만화가대회(1996년) 등 굵직한 대회의 산파역을 맡는 등 우리나라 만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현재 ‘백세시대’ 신문에 ‘독고영감’이란 타이틀로 만화를 연재 중이다.

-한국원로만화가협회는 어떤 단체인가.
“1960~80년대 우리나라 만화계를 이끌었던 최고의 만화가들이 모여 2009년에 만든 사단법인입니다. ‘백세시대’ 신문에 만화와 삽화를 연재하는 신문수‧이두호‧김박‧오룡‧이정문 등 59명의 회원을 두고 있어요. 고바우 김성환 화백이 고문으로 계세요. 나이를 초월해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원로만화가들의 축적된 노하우가 젊은 만화가들에게 방향 제시 등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간 어떤 일들을 해왔나.
“국내외 전시, 사인회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경남 하동의 야생차축제에 수년째 참여해 방문객들을 상대로 사인회를 열고 있고요. 지난 9월, 중국 청도에서 ‘한중만화달인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한‧중 두 나라의 원로만화가들 50여명이 상호간 작품을 전시하고 친목을 돈독히 하는 교류전이지요.”
-해외전시에 대한 호응은.
“중국 정부에서 지원을 많이 해줍니다. 3일간의 전시 동안 총 2000여명이 다녀갔어요. 우리 만화가들이 중국의 청소년‧성인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시연도 했고요. 중국에는 우리처럼 원로만화가협회가 없어요. 우리 협회를 보고 자기들도 만들겠다고 정관과 가입신청서 등을 가져갔어요.”
-원로만화가들의 경제적 사정은 어떤가.
“10% 정도는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해 여유롭지만 대부분 형편이 어려워요.”
-‘~역사를 품다’에는 어떤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인가.
“최근 시국과 관련된 역사물들이에요. 예를 들어 쓰나미가 청와대를 덮치는 만화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을 당한 현 정권을 비유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만화들이에요.”
-원로만화가들의 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국민들과 뜻을 같이 하면서도 촛불시위가 지나치다거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너무 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어요.”
-원로만화가들의 재능기부는 어떻게 가능할까.
“저희가 대한노인회에 제안한 적이 있어요. 노인들에게 만화자서전을 그리게 하는 겁니다. 경로당의 노래, 건강체조 프로그램처럼 노인들이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만화로 그리면 정서적으로 좋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위로 받고 삶에 대한 의욕도 새롭게 느끼겠지요. 만화 그리는 방법은 저희들이 코치해주고요.”

권영섭 회장은 경북 영주의 부잣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20세 때 대구매일신문‧연합신문의 만화공모에 각각 가작으로 당선돼 만화가의 길을 걸었다. ‘봉선이’란 캐릭터로 ‘순정만화’의 문을 열었다는 평을 얻었다. 1980년대 들어 만화가 쇠락의 길을 걷자 만화 창작을 중단하고 종교단체에 들어가 30여년 근무했다. ‘한국만화상’(1977년), ‘어린이문화대상 눈솔상’(2008년) 등 수상. 한국만화가협회‧한국기독만화선교회 고문으로 있다.
-어릴 적 만화를 좋아했나 보다.
“교회에서 만화를 보여주며 전도를 했습니다. 저도 만화 보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10~16쪽짜리로 허술한 해적판 만화였어요. 어린 나이에 교회에 있는 많은 책들을 다 읽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봤을 정도니까요. 그때 읽은 책들이 후에 만화 그리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잘 살았는데도 일반대학을 안 간 이유는.
“만화 그리느라고 안 갔어요. 연합신문에 촉탁기자로 ‘우리들의 척척박사’라는 과학이야기를 그리면서 대본소 만화도 그렸어요. 당시 아이들이 만화가게에서 빌려보던 만화책들을 말합니다. 제 동생이 서울대 법대를 나와 합동통신 다니며 받던 월급의 30배를 만화를 그려 벌었습니다.”
-‘순정만화’는 어떤 만화를 말하나.
“대부분의 만화가 스포츠, 서부활극, 첩보물 등이었어요. 순정만화는 그 반대편에 선 만화를 말합니다.”

-남자가 순정만화를 그렸다는 게 특이하다.
“통신장교로 제대한 형님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을 파탄시켜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걸 보면서 형님과 질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봉선이 시리즈’를 그리게 됐습니다. 제가 일찍부터 기독교를 믿은 것도 그런 만화를 그리게 된 배경 중 하나일 겁니다.”
-‘봉선이’란 이름도 정겹다.
“숙명여대 음대학장이었던 김천애란 분이 1942년 봄, 홍난파 선생이 작곡한 ‘봉선화’란 가곡을 일본 히비야공회당에서 처음 불렀어요.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가사에 사람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김천애 학장이 제가 다니던 교회 집사였어요. 청년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했던 그분과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만든 이름이에요.”

권 회장은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울밑에 선 봉선이’, ‘봉선이와 아나(고양이 이름)’, ‘봉선이와 바둑이’ 등 ‘봉선이 시리즈’와 ‘오손이 도손이’ ‘은색의 십자가’ 등 300여종, 1500여권의 만화를 그렸다. 아울러 부와 명성도 얻었다.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나.
“한달에 만화 2권씩 그려주면 집을 사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문하생 없이 혼자 130여쪽 되는 만화를 매달 두권씩 그리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가난했던 시대라 밤 12시에 전기가 나가면 초를 켜놓고 그리기도 했어요.”
-봉선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해 달라.
“만화에는 봉선이 아버지가 죽는 걸로 나와요. 형님이 제가 드린 만화를 보더니 ‘내가 죽으란 말이냐’라면서 만화책을 찢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미국에 사는 봉선이의 실제모델인 질녀가 최근에 한국에 들어와 같이 식사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카는 어릴 적에도 자기가 만화의 주인공이 된 걸 좋아했어요.”
-만화 창작에서 손을 뗀 이후엔 무얼 했나.
“한국어린이전도협회 대표를 지내며 교육과 시청각자료 개발에 관여했어요.”
-돌이켜보면 어떤 일들이 기억에 남나.
“1990년대 초 어린이날마다 남산에서 시민단체가 만화책이 불량하다고 태운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되면서 그걸 막았어요. 2013년 정부로부터 만화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을 받고, 협회 회원들이 국가가 주는 훈장 등을 수상하는데 일부분 기여한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글=오현주 기자, 사진=이상연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