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서 있는 단주와 아내의 사이가 너무도 밀접해 보이면서 문득 착각이…
나란히 서 있는 단주와 아내의 사이가 너무도 밀접해 보이면서 문득 착각이…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1.06 13:28
  • 호수 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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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18>

밖에 세란과 같이 서서 미란의 자태를 우러러보는 단주는 어떻게 되다가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현마가 대신 앉게 되었나 싶으면서 삽시간의 변화에 정신이 휘둘리며 한 줄기 섭섭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역 옆에 서 있는 세란을 생각할 때 든든한 마음이 생기면서 알 수 없는 의지하는 생각으로 섭섭한 감정쯤은 말살하지 못한 배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세란은 낙오된 꼴을 가엾게 여겨 주는 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자기를 싸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미란의 물고기같이 파들파들한—— 그러므로 물고기같이 싸늘한 감각과 애정에 비겨서 세란의 그것은 따뜻하고 크고 너그러운 어머니의 정으로 신변에 흘러오는 것이었다. 미란과 현마는 그들 한패, 우리는 또 우리끼리 한패가 아니냐고 그의 부드러운 눈이 속살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토록 두 사람은 밀접하게 서서 집에 남는 사람으로서의 동정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사실 발동소리가 나면서 여객기가 막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작별의 손을 저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현마에게는 어깨를 같이하고 나란히 서 있는 단주와 아내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도 밀접해 보이면서 문득——단주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자기가 서 있을 자리라는 생각이 들며 자기 대신으로 들어선 단주의 꼴이 일순 자기 자신으로 보여 저것이 짜장 부부가 아닌가——하는 착각이 번개같이 등줄기를 쳤다. 이 돌연히 엄습한 당돌하고 무서운 착각은 땅 위를 떠나 몸이 하늘 위로 높이 솟을 때까지도 그의 골속을 휭하니 뒤흔드는 것이었다.
현마와 미란을 하늘 밖까지 떠내 보내고 나니 세란은 짐을 벗은 듯 마음이 놓이며 그래도 얼마간 울가망해하는 단주를 한마디 달래주어야 할 책무를 느낀다.
“누가 일을 저지르라나 이렇게 되게. 잠자쿠 가만히만 있었으면야 장차는 결혼도 시켜주구 뜻대로 이루워주지 않았으리. 어려운 줄 모르구 섣불리 나서다가 이 꼴이 됐지. 어서 당분간 다 잊어버리구 마음이나 잡을 도리 생각할 수밖엔.”
다시 거리로 들어갈 때 차 속에서 여전히 잠자코만 있는 것을 보면 어깨라도 치면서 정신을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즉 열흘 동안이니 마음 풀어 버리구——그까짓 사내대장부가 무얼 꼬물꼬물 그래.”
사내대장부라는 말에 단주는 미상불 정신이 띄어지면서 세란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가슴을 펴보았다. 세란쯤은 넉넉히 정복할 수 있을 듯 숨었던 새로운 용기를 얻은 듯도 하다. 사실 차를 내려 나란히 서서 걸을 때 비록 몸은 가느나 키는 큰 단주는 세란의 목 위를 훨씬 솟아 그 비교에서 오는 일종의 늠름한 우월감이 의식 속에 솟기 시작하며 그 우월감이 전에 없던 한 가지 태도를 지니게 했다. 벌써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요 어른이 여자를 동반했다는 의식이 은연중에 그런 태도를 가지게 한 것이었다.
식당에 마주앉아 식사를 할 때나 백화점에 나란히 서서 흥정을 할 때나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의 사이를 무엇으로 여겼을까. 부부로 보았을까, 형제로 보았을까. 부부라기에는 나이의 동이 뜨나 형제라기에는 사이가 지나쳐 자별스럽고 허랑해서 판단에 애썼을 것이 확실이다. 그 길로 영화사에 들렀을 때 세란은 주인 없는 사장의자에 덜석 앉아서는 호락호락 서랍을 들치며 책상 위를 살피고 하면서 단주에게서 여사장이라는 칭호를 듣다가 문득 여사장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그 자리를 단주에게 사양하고 자기는 단주의 자리를 차지해도 본다.
“그래두 사내붙이가 다르긴 달러. 그 자리에 앉으니 제법 사장 감인데.”
현마의 자리에 앉은 단주의 자태가 제자리에 앉았던 단주와는 다르게 일종의 위엄을 띠인 것을 세란은 보며 그에게도 결국 남편의 자리를 주면 별수없이 남편같이 보이게 되는 요술을 신기한 것으로 여겼다. 두 사람의 수다스러운 변덕을 옆에서 바라보는 여급사 애영에게도 오늘의 단주의 자태는 전에 없이 어른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현마가 아직 사에 나오지 않을 때 단주 혼자만이 있을 적에 그는 흔히 현마의 안락의자에 앉아서는 몸을 좌우로 틀었다 문서를 들척거렸다 하면서 애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는 소리를 지르기가 일쑤여서 그 되지 않은 아이다운 모양에 애영은 웃음이 터지곤 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의 그의 자태에는 의젓하고 그럴듯한 데가 보였다. 세란이 그와 마주앉게 되어 그 젊은 자태와의 대조에서 오는 인상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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