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춤 못 추는 것같이 치욕은 없어”… 세란은 단주의 손을 잡아 끈다
“사내가 춤 못 추는 것같이 치욕은 없어”… 세란은 단주의 손을 잡아 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1.13 13:41
  • 호수 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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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19>

집에서도 같은 격식이 시작되었다. 현마 없는 뒷자리가 완전히 단주의 것이 되었다. 한집에 밖 주인의 권리를 위해서 있게 되는 모든 설비와 범절이 별수없이 잠깐 동안 주인의 뒷자리를 물려받게 된 그의 차지가 되게 된 것은 자연한 형세였다. 현마의 본을 받아 목욕실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도 단주였고 목욕을 하고 나와서 갈아입은 잠자리옷도 현마의 것이었다. 식탁에서도 현마의 자리, 대청에서도 현마의 자리——그대로가 바로 단주의 자리였다.
“잠깐 동안이래두 집을 지켜주는 가장이니 가장 대접을 해줘야지. 가장은 가장이래두 지킴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말하자면 의장병이라는 것——.”
식후의 시간을 대청에서 쉴 때 현마의 의자에 앉은 단주를 경계하는 듯도 한 세란의 말투였다.
“좋게 말하니까 의장병이지 실속은 노예란 말이죠.”
단주의 대꾸를 세란은 무시하며,
“암. 실상 주인은 나니까 내 명령대로 쫓는 것이 노예의 직분이거든.”
“맙소서.”
단주에게는 현마의 자리가 주체스럽게 여겨지면서 생각은 멀리 창밖 어두워 가는 하늘로 달렸다.
“미란은 벌써 동경 땅을 밟고 지금쯤 여관방에서 잠시 고향 생각에 잠겼으렷다.”
“고향 생각은 왜. 좋아라구 날뛰면서 벌써 극장 구경을 안 떠났으리. 남은 패보다는 항상 떠난 패가 더 즐겁거든.”
“그렇까.”
“그렇지 않구 우리같이 이렇게 쑥스럽구 점직할까. 뽑다 뽑다 재수 없는 제비만 차려졌지.”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라는 듯이 세란은 일어서서 축음기에 레코드를 걸고 나서는,
“춤이나 가르쳐 줄까.——사내가 춤 못 추는 것같이 치욕은 없어.”
단주의 앞에 와서 손을 잡아 끈다. 레코드에서는 가벼운 트롯이 흘러나왔다. 차차 높아지는 마음의 율동을 느끼면서 단주는 세란의 손을 손에 받으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마침 식후의 차를 날라 가지고 들어온 옥녀에게는 두 사람의 모양이 신기한 것으로 보였다. 주인이 집을 떠난 후로는 별안간 집안의 공기가 일변된 듯이 느껴졌다.
현마가 세란과 부부라면 단주는 반드시 미란과 짝이 되어야 옳고 그편이 한결 눈에 익고 자연스럽게 보이던 것이 이상스럽게도 그 짝들이 어그러졌을 때 옥녀에게는 일종 어색한 느낌이 왔던 것이다. 현마의 뒷자리에 들어앉게 된 단주의 꼴이 주제넘으면서도 회뚱회뚱 약해 보이며 전체로 집안의 풍속이 뒤틀리고 젊어져 보였다. 세란은 현마와도 춤을 추며 야단들을 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이제 그 춤의 상대자가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단주 혼자임을 볼 때 아무래도 괴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도 아니요 형제도 아닌 떳떳하고 의젓하지 못한 관계---그가 막 들어왔을 때에 마치 그 무엇을 훔치다가 들켜서 움출할 때와도 같은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서는 더욱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제발 주인 없는 빈집에 아무 일 없도록——”
축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속이 차지면서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도 없어 찻그릇들을 탁자 위에 놓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웬일인지 옆에서 보기가 제 스스로 겁이 나는 것이었다.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집에서만 종일을 지내기가 지리한 세란은 거의 날마다 단주를 따라 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백화점을 돌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그런 습관이 현마와의 때에도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더욱 잦게 된 것이 사실이었으며 거리에 나갔던 길에 번번이 한 번씩은 회사에 들려 애영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이게 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옥녀에게 같은 눈치를 보이게 되었다. 밤은 낮의 연장이어서 세란을 지켜주어야 되는 단주의 직분은 침실에까지 적용되었다. 방에 도적이 들지 않을까 세란이 감기에나 걸리지 않을까——이것을 주의하고 살피는 것이 단주의 충복된 뜻이 아니던가. 단주는 처음에 대청의 침대를 자기의 잠자리로 주장했으나 세란에게 핀잔을 맞고 방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현마의 잠자리는 세란과 같은 요 위인 것이다. 단칸방 복판에 조그만 찻상을 놓고는 그것을 지경으로 양편에 각각 자리를 펴는 것이었으나 밤마다 자릿물을 떠가지고 들어와 상 위에 놓고 나가는 옥녀의 눈에는 그 기괴한 방안의 꼴이 아이들 장난 같이만 보이면서도 한편 유난스럽게 신경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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