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그 치료적 역설
망각, 그 치료적 역설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장
  • 승인 2017.01.20 13:09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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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맹세를 나눈 사이, 그 혈맹은 기꺼이 동지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성경구절에 나오듯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혈맹이란 인간적 약속 이상의 결연한 계약이요, 의연한 약속이라 할 것이다. 때로는 손가락을 걸고, 때론 손바닥 전부로 자신의 맹세를 보이기도 하며, 피를 내어 충정을 보이기도 한다. 배우자와 나눴던 금가락지 그 작은 금속에 우리는 미래를 서로 묶었고, 그 성스러운 계약은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약속마저 앗아간다.
늙도록 함께 하겠다던 친구는 약조를 버리고 먼저 세상을 뜨고,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다던 아내는 주름의 깊이만큼 바가지를 긁는다. 그나마 긁던 바가지도 아프니, 늙으면 가만히 안두겠다던 그 힘찬 맹세마저도 그립다. 야속한 세월은 친구의 우정맹세를 흐리고, 아내의 사랑기억도 매정할 정도로 빠르게 지워버리기 일쑤다. 이렇게 세월 속에 우리의 맹세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늘 망각 속에 흐려지고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다.
그런데, 그게 좋다! 아니, 그래서 좋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어떨까? 지켜야할 약속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니라,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이 우리의 심장을 쥐어 짤 것이다. 약속은 잔상이 아니라 선명한 도장처럼 우리의 가슴에 박혀 못이 됐을 것이다.
적절히 잊는 이 망각이 있어 고통을 슬쩍 넘어갈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하면 어쩔 뻔 했는가? 늙도록 속을 썩였던 그 인간의 융털돌기까지 찾아가 복수하고야 말 것이다. 무시했던 순간들, 숨죽이게 만들었던 그 아찔한 통증의 시간들, 다짐을 매번 무너뜨리는 뻔뻔함의 기억들이 나노수준의 기억으로 살아난다면 어떨까?
이 모든 순간들은 고마우면서 놀랍게도 가끔 나타나기는 하나 결코 선명하지는 않다. 너무 많아 다 기억할 수 없어서이건, 기억의 용량이 달려서이건, 뇌가 축소돼서이건 간에 우리는 ‘너무’ 기억하지는 않는다. 망각, 그 레테의 강물은 그래서 때로 우리에게는 달디 달다. 진짜 우리의 문제는 ‘너무’ 해석한다는 것이다. 뇌를 보면 우리는 한번에 5~9개를 기억할 수 있으나,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기억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극한의 고통이나, 극도의 불안 등 처절하게 심장에 흔적을 남기는 일 말고는 대부분 우리의 기억은 ‘~했었던 것 같다’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기억에 살을 붙이고 기억이 추억을 넘어 상처가 되게 하는 과정들은 분명 있다. 바로 ‘해석’이다.
해석은 상황에 대해 미래로 난 길이다. 해석이 결과를 이끄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관계에 팩트(fact)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기억한다기보다 해석한다. 친구와의 약속을 해석하고, 아내와의 기억을 해석할 뿐이다. ‘그땐 그랬지’는 기억의 결과라기보다는 해석의 결과물이다. 기억을 통해 해석을 추려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기억을 과거의 길목에서 찾아낸다. 곧, 해석이 우리 기억의 양과 한계, 상태 등을 결정한다. 못 지킨 약속이 아니라,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나의 해석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는 나를 용서하거나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의 사이에 세월과 망각이 파고든다. 고맙게도 나를 옥죄는 것들을 시간과 망각이 적당히 그 기억의 고통을 덜어준다. 인간은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가벼워져야 비로소 해석을 시작한다. 그러니 망각은 해석을 위한 사전과정이자 동시에 선물이다.
망각하고 남은 기억으로 우리는 과거를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너무 고통스럽다면 저절로 그 기억은 무의식 저 밑바닥으로 밀려날 것이고, 숨 쉴 정도의 기억은 의식의 수면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올라온 기억으로 우리는 기억의 모양을 보며 ‘좋았다’, ‘나빴지만 잘 지냈다’, ‘이만하면 잘 했다’, ‘못한 부분도 있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라는 평가와 해석을 내어놓게 된다. 망각이 고맙다. 혈맹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망각이 덜어낸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동맹이 남아있고, 배우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뼛속까지 저리다 생각했지만, 망각필터를 통과하면 사랑의 해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노년의 망각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젊은 시절 망각은 실수투성이 인간을 만들지만, 늙어가는 시기 망각은 관대함을 낳으니 말이다.
잊어야 용서하고, 가물가물해야 관대해진다. 손과 혀까지 마르니 늙을수록 물을 많이 마셔야한다고 말하던가, 그렇다면 좀 더 많은 망각의 물을 마시자. 돌아보는 자는 소금기둥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듯, 망각의 물을 마신 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망각은 사람을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힘이고 관대한 해석을 향해가는 동력일지니, 늙도록 망각하고 늙도록 앞으로 걸어가자. 망각의 복도를 지나면서, 우리는 잃음으로 찾고 잊음으로 얻게 되니 노년의 망각이야말로 치료적 역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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