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 드러내 놓은 세란의 모양을 보고 단주는 몸이 불같이 달아졌다
종아리 드러내 놓은 세란의 모양을 보고 단주는 몸이 불같이 달아졌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1.20 13:29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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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20>

상 하나를 사이에 둔 잠자리 속에서 단주는 고시랑거리면서 잠이 안올 뿐더러 언제인가 폭풍우날 밤 아파트에서 미란과 같이 지냈을 때와 똑같은 운명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불안과 공포가 솟으면서 전신의 피가 개울물같이 넘치고 신경이 삼단같이 흩어졌다. 상 하나의 국경선이 마치 해발 수천 킬로의 험한 분수령 같고 그것을 넘음이 금시 목이라도 달아날 밀수입의 행위 같은 모험으로 여겨졌다. 그 험준한 국경선을 드디어 넘게 된 것은 확실히 세란의 충동질과 조력에 인함이었다. 세란에게는 미란과 같은 불안과 공포는 없었다. 그 편편하고 안온한 상태가 단주에게 대담한 동기를 일깨워준 것이 사실이었다. 울 너머 아이에게 손짓해서 울을 넘어 앵도나무 아래로 끌어들이게 한 셈이 아니던가.——
이틀 밤을 고시랑거리다가 사흘 되는 밤 단주는 역시 잠을 못 이루고 머리맡에 쌓인 묵은 영화잡지를 들척거릴 때 책갈피에서 괴상한 그림 한 장이 눈앞에 떨어졌다. 전에 본 적이 없던 대담하고 망칙한 한 장의 그림! 단주는 눈이 번쩍 띠이며 그 한 장 위에 시선이 해면같이 흡수되면서 전신의 피가 수물거리기 시작했다. 잡지 속의 그림들이 대개 여배우들의 천태만상의 변덕스러운 자태의 나열인 것이나 무슨 까닭으론지 그 속에 끼이게 된 그 한 장은 그 모든 그림보다 백 곱절의 감각과 자극을 불러 백금의 광채같이 눈을 휘황하게 했다. 지금까지 장막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인생의 비밀을 한 눈에 목도한 듯 어쩔 줄 모르고 손바닥으로 그림을 덮고 눈을 들었을 때 상 너머서 세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기의 황당해 하는 꼴을 세란은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신기할 것이 무에 있어. 그까짓 그림쯤이.”
단주는 더욱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한층 붉어짐을 느낀다.
“가방 속을 들치면 얼마든지 있다나. 신경 갔던 길에 수십 장을 사서 가방 속에 감춰 가지구 와서는 몸에 지니면 재수가 있다구 양복 속 주머니마다 한 장씩 넣어 가지구 다니더니 한 장 두 장 없어지구 남은 것이……”
어른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세란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인 양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나 인생의 초년병인 단주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넘겨버릴 물건이 아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며 손 아래에 있는 그 한 장을 어떻게 처치할지를 모르고 있을 때 세란은 자리를 벌떡 일어나더니.
“더 기막힌 것 한 장 보여 줄까. 서양 남녀같이 괴덕스러운 건 없어. 별별 시늉을 별별 수작을 여사로 하거든”
하면서 옷섶을 아물리고 서서 벽장 속의 가방을 들추는 모양이었다. 종아리를 드러내 놓은 세란의 그 모양을 보고 단주는 몸이 불같이 달아졌다.
“제발 맙소서.”
입안으로 중얼중얼——견디다 못해 이불을 박차고 허둥허둥 문을 밀고 대청으로 달아나 버렸다.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세란의 쫓아오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현관문을 열고 대문 밖까지 뛰어나간 것이 도시 그 무엇에 홀리운 듯도 한 거동이었다. 꽃이 져버린 라일락의 수풀이며 잎이 퍼지기 시작한 개나리의 포기가 발아래에 되구말구 채일 지경으로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에 용솟음치는 것이다. 밤늦은 거리로 들어가 대중없이 골몰골목을 더듬어 처음 오는 그 낯선 거리를 찾아낸 것도 온전히 그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무서워하고 겁내고 침 뱉던 그 거리——도회에서 제일 하층 가는 지옥이나 다름없이 꺼려하고 멸시하던 그 지대가 오늘밤에는 그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오면서 복받치는 힘이 그를 그곳까지 인도했다. 거기서 우선 인생을 시험하자는 것이었다. 첫 대문을 두드려 보고 용기를 얻자는 것이었다. 뭇사람이 하는 것과는 격식이 달라 선을 볼 것도 없어 문간에 서 있는 아무나 한 사람을 시험용으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과학자가 시험용 토끼 한 마리를 우리에서 집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볼 것이 없이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육체를 해부하려는 것이었으나 겁을 먹은 탓이었을까, 시험은 실패였다…….
정신이 깨면서 환멸이 오고 뉘우침이 컸다. 이것이 인생인가, 인생은 겨우 요것뿐이던가——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요것뿐인 인생을 위해서 좀 더 건사해야 할 것을 너무도 학대하고 멸시했다는 후회가 솟았다. 자기의 육체에 모욕을 준 그 이름모를 여인의 육체를 한없이 천한 것으로 여기면서 거리를 다시 벗어나올 때에 입안에는 군침이 돌며 구역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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