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원 전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한센인‧진폐 환자에 이어 아프리카 환자들을 돌보고 싶어요”
조창원 전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한센인‧진폐 환자에 이어 아프리카 환자들을 돌보고 싶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1.20 13:34
  • 호수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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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원 전 원장은 개인전을 열 정도로 수준급 화가이다. 요즘도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고 지낸다.

소록도 병원장 2차례 역임…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 실제인물
한센인들 생활터전 마련 위한 ‘오마도 간척사업’… 꿈 못 이뤄 恨

영화 ‘서편제’의 원작자 이청준(1939~2008)의 대표작 중 하나가 ‘당신들의 천국’이다. 군의관 출신의 소록도 병원장이 한센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을 벌였지만 모함을 받아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의 실제인물이 생존해 있다. 조창원(91) 전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서울대 의대 출신인 그는 50여년 한센인, 진폐환자 등 소외된 이들에게 인술을 펼친 의인이다. 서울 문정동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는 조 전 원장에게서 오마도 간척사업의 진실과 드라마틱한 삶을 들었다.

-소록도 병원은 어떻게 가게 됐나.
“누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에요. 의대 교수님이 의사라면 소록도에 한번쯤 가보는 게 나중에 의사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한 말이 생각나 1961년 5‧16 정변 직후 육군대령(군의관) 신분으로 소록도에 갔어요.”
-당시 소록도는 어땠는가.
“9월 1일, 제가 온다고 하니까 거기 중앙공원에 5000여명의 나환자와 직원들이 다 모였어요. 아, 그 냄새…. 바람이 불면 숨을 못 쉴 정도였어요. 그래서 환자들을 돌보는 직원과 가족이 훌륭한 사람들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 전 원장은 ‘나병은 낫는다’는 글을 섬 곳곳에 써 붙이는 등 환자들에게 회복에 대한 희망과 용기, 격려부터 해주었다. 그는 “나병은 손가락‧발가락이 뭉개지는 등 갈 데까지 가면 저절로 낫는 희한한 병”이라고 말했다.
-한센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환자와 직원 숙소 사이에 있는 철조망부터 없앴어요. 소록도 운영 방식에 변화를 주고 소록도 원생들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려고 축구팀을 만들기도 했어요. 당시 우리 국립소록도병원팀은 고흥군에서 열린 5‧16기념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여세를 몰아 전남 체육대회에 고흥군 대표로 출전해 우승, 전국 체전까지 나갔어요. 그야말로 ‘발가락 없는 축구팀’이 기적을 이룬 거지요.”
-미스소록도 선발대회도 열었다고.
“어느 날, 혁명정부에 올라갔다가 세관에서 압수한 밀수화장품을 소각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평생 화장 한번 못해본 이들에게 유두분면(油頭粉面)할 수 있다는 기쁨을 주고 싶었거든요. 병사 원생들에게 화장품을 유출시키면 엄벌에 처할 거라고 훈시하고 ‘이제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갈 때 얼굴에 분도 좀 바르고 머리에는 포마드도 좀 바르고 화장하고 다니시라”고 했어요. 이왕 화장 한 김에 미스소록도 미인선발대회를 열어보자고 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한센인들에게 슈바이처 같은 분이었다.
“90 평생 가장 큰 보람은 소록도에 간 겁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기 출신 사람들에게서 안부전화가 와요. 그 사람들은 출신을 밝히지 않아요. 아마 다른 병을 그만큼 치료해주었다면 노벨의학상을 받았을 겁니다. 현재도 한센 정책자문위원입니다.”
-오마도 얘기는 무언가.
“치유환자의 사회복귀와 자활정착을 돕기 위한 국책사업이었어요. 음성 환자들을 집으로 보내면 쫓겨서 도로 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농업이나 축산업에 종사하면서 자활을 할 수 있도록 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고흥군 봉암반도와 풍양반도, 그 중간에 있는 오마도와 오동도를 잇는 2800여m의 제방을 쌓고 약 330만평의 농토를 만드는 간척사업에 손을 댔어요.”
-한센인들의 힘만으로는 바다를 막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보다는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더 힘들었어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온 수탈의 역사 때문이었지요. 이전의 원장들이 하나같이 한센인들을 위한답시고 사업을 벌여놓고는 노동력 착취를 통해 그 공은 자신들이 가로채왔어요. 저는 ‘바다만 막으면 대평야가 생겨나고 땅에서 쫓겨난 한을 바다 위에서 풀어보자’고 그들을 설득한 끝에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완공은 보았나.
“손가락이 없고 발도 절고 약을 먹어 힘이 없는 그들이 온몸으로 돌을 날라 제방을 쌓았어요. 그런데 2년여의 투석작업 끝에 80% 정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당시 신모 국회의원이 ‘오마도에 환자를 정착시키지 않겠다’면서 ‘조창원이 높은 자리를 원한다‘고 모함을 해 결국 병원장직에서 물러나고 간척사업에서도 손을 떼게 됐어요.”

오마도는 그 후 전남도 사업으로 이전돼 완공을 보았으나 한센인들은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일반 주민들에 분양된 것이다. 조 전 원장에게 남은 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한 장 뿐이었다.
-신 의원에 대한 한이 남아 있겠다.
“그 사람의 동생도 국회의원을 했는데 몇 년 전 행사장에서 절 찾아와 ‘형이 괴롭힌 데 대해서 내가 급히 사죄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어요. 그를 적으로 여겼던 일이 한순간 사라져버렸어요.”
-이청준의 소설을 읽어보았는지.
“그럼요. 사실을 바탕으로 쓴 훌륭한 작품입니다. 1971년 저를 찾아와 소록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당신을 주인공 삼아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하다’고요. 저도 ‘그런 이야기를 써줘서 내가 더 고맙다’고 했어요.”

조 전 원장은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거쳐 서울대 의대를 나왔다. 6‧25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오마도 사태로 인한 불명예를 씻고 한 번 더 소록도 병원장을 역임하고 난 후 태백 장성병원 원장으로 갔다. 조 원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진폐증이라는 병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일본의 진폐전문병원을 찾아가 배워가지고 와서 진폐 환자들을 치료했다”며 “의사들도 마스크조차 쓰지 않았던 당시 진폐 전문의가 처음 생긴 셈이며 우리나라 진폐 역사가 바로 내 역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진폐 환자들이 많았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모두 진폐 환자였어요. 탄광촌기념관에 가면 제가 진폐 환자의 폐를 따로 떼어내 보존해놓은 걸 볼 수 있어요.”

조 전 원장은 이후 대전과 밀양에도 진폐 병원을 세우고 20년 가까운 세월을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가 청진기를 손에서 놓은 나이는 80세였다.
-인생 철학은.
“약자, 없는 사람 도와주는 삶을 살아왔어요.”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2년 전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가 됐어요. 다리만 괜찮으면 아프리카에 가서 환자들을 돌 볼 겁니다.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분풀이로 그림을 그려요. 소록도와 탄광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어요. 연말에 그린 저 그림, 까만 색칠한 사람이 저에요. 양쪽에서 밀물이 밀려옵니다. 저는 걷고 있지만 결국은 죽는 거지요. 그러나 무섭지 않아요. 예전처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안 해요. 뭔가 남겨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려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김학윤 기자 

▲ 조창원 전 소록도 병원장이 지난해 마지막 날에 그린 작품. 죽음을 예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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