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꿈을 꾸고 있었던 미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불붙기 시작했다
여배우 꿈을 꾸고 있었던 미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불붙기 시작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2.10 14:25
  • 호수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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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22>

그러나 미란의 경우는 실상에 있어서 이와는 퍽도 달랐다.
만리 허공을 날아서 낯선 도읍에 이른 그는 새같이 하늘을 날았다는 것과 화려한 도회에 왔다는 두 가지 신기한 사실로 해서 감격으로 마음이 그득 불렀다. 현마를 따라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여관으로 돌아오면 피곤한 몸에 고요한 일순 집 생각과 단주의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다음날의 분주한 계획을 궁리하노라면 그런 수심은 오래 끌지 않고 금시 사라졌다. 처음 보는 도회의 구석구석이 진미를 갖춘 찬란한 식탁같이 마음을 유혹했다. 백지 같은 미란의 마음은 그것들을 일일이 맛보고 받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었다. 놀러 나갔다 흐뭇한 잔칫상을 받고 집도 오물하던 생각도 다 잊어버린 아이 모양으로 그 가지가지의 자극에 정신을 송두리째 뺏긴 미란이었다. 거리를 걸어도 한 가지 한 가지가 눈을 끄는 것이었고 조그만 찻집에를 들어가도 새로운 감각이 마음을 즐겁게 했다. 새것을 보아도 모르는 척, 귀한 것을 보아도 대수롭지 않은 척, 좋은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않는 척하는 까스러진 어른의 버릇에 아직 물들지 않은 그의 마음은 가지가지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진귀한 것에 대해서 솔직한 감동과 놀람을 나타냈다. 그 마음을 살핀 듯 현마는 뒤를 이어 차례차례로 새것을 그의 눈앞에 드리우고는 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영화구경을 갈까.”
제일 크다는 영화관에를 따라서 들어가면 언제나 가장 새것이——아직 세상사람 눈에 다 슬려나지 않은 풋작품이 걸려 있어서 새로운 지식을 더해 주었다.
“호텔에 저녁을 먹으러 갈까.”
호텔 객실과 식당에서는 탁자마다 국제적인 풍속이 눈에 띠이면서 안계가 넓어졌다.
“촬영소 견학을 갈까.”
촬영소 견학은 아마도 현마 자신의 이번의 용무 중에서도 중대한 부분이고 장래 계획에도 참고가 되는 조목인 모양이었다. 거기서 미란은 한 새로운 세상을 본 듯 야단스런 기계의 장치며 오락가락하는 배우들이며 촬영하는 현장의 요란스런 장면이며가 알 수 없는 흥분을 자아내면서 예술의 분위기가 정신을 흠뻑 취하게 했다. 제작의 기쁨이라고 할까, 한 토막 한 토막 꾸며내고 빚어내는 그 사업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흥이 나면서 막연히 여배우 지원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을 회상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가슴속에 새로 불붙기 시작했다.
“심술피지 말구 말만 잘 들으면야 나중에 촬영소 세우게 되면 여배우 안 시켜 주리.”
현마는 오락가락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누구니 누구니 뙤어 주면서 미란의 마음을 한층 달뜨게 불 지르며 가까운 장래의 계획을 토막토막 이야기해 준다.
날마다 시간마다 목격하게 되는 허다한 새로운 재료와 사실이 미란의 마음을 한없이 열어주며 걸을 때나 앉았을 때나 볼 때나 그 무수한 것을 받아들이기에 마음은 분주하고 세상이 이렇게도 넓은가 생각하지도 못한 동쪽 한구석에 이런 놀라운 생활의 사실이 있을 제는 세상을 통 턴다면 얼마나 인생이란 넓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어지럽고 착잡한 재료의 세상에서 차차 한 가닥의 방향과 통일이 마음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한없이 착잡한 재료 속에서 골라낸 것은 역시 아름다운 것의 요소였고 그것의 배열——예술의 감동이 마음을 차차 정돈시켜 주고 의욕을 자극해 주었다. 세상을 해석할 한 개의 표준 되는 열쇠가 어느 결엔지 손안에 잡히면서 그것이 새로운 힘으로 마음을 다시 불 지르게 되며 평생의 방향과 결의가 작정되었다. 예술의 사업——이 제목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면서 한결같은 감격이 박하같이 전신에 퍼졌다. 촬영소에서 받은 감동도 큰 것이었으나 그보다도 더 큰 감동이 그의 마음을 회오리바람같이 저어놓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힘과 최후적 결심을 자아내게 하는 날이 왔다. 촬영소를 견학한 다음날 밤 일이었다. 공회당에서 열린 음악회를 들으러 간 날 밤——해외에서 음악수업을 마치고 가제 돌아온 천재소녀의 피아노 음악이 미란의 마음을 그다지도 흔든 것이었다.
그날 마침 현마는 아마도 회사와의 영화 교섭의 일이 순조롭게 되었는지 유쾌한 기분에 대강 볼 일이 끝났다고 기뻐하면서 미란에게 항구 구경을 안 가겠느냐고 자청했다. 항구라는 말에 한 줄기 감상(感傷)을 느끼면서 미란은 따라나섰다. 기차로 한 시간 남짓 걸려 태평양의 물이 바라보였다. 잘 개인 그날의 바다는 전을 편 듯이 고요하면서도 약간 쌀쌀한 맛이 여린 피부에 사무쳐 들었다.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넓은 부두, 아마도 만 톤급에 가는 듯한 육중한 외국 기선, 그것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무수한 배들——모두가 고요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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