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 관악문화원장 “매달 2000만원 기부… 남 도우면 제 마음이 편해요”
김윤철 관악문화원장 “매달 2000만원 기부… 남 도우면 제 마음이 편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2.10 14:27
  • 호수 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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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약 배달, 옷가게 운영 등 30대부터 땅 사모아
서울 관악구지회 전 경로당에 10여년째 목욕비 지원

서울 관악구지회 112개 경로당 회원들은 ‘공짜목욕’을 즐긴다. 5000여명의 노인회원들은 지난 10여 년 간 몇 차례씩 무료로 목욕탕을 다녀왔다. 이들에게 목욕비를 꾸준히 대주는 이는 바로 김윤철(75) 서울 관악문화원장이다. 청소년 , 불우이웃 등에게도 선행을 베푸는 그의 한달 기부액은 1500만~2000만원에 달한다. 금액이나 기간 면에서 볼 때 가히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기적적인 일이 가능한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관악문화원 원장실에서 만나 기부가 전부인 삶을 들었다.

-‘목욕 기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관악구 내 몇몇 단체가 모인 자리에서 정재수 전 관악구지회장에게서 ‘관내의 어르신들이 형편이 어려워 목욕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짠했어요. 그때는 어르신전용목욕탕을 만들어드리고 싶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어요. 그래서 목욕비라도 마련해 드려야겠다고 해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장석기 서울 관악구지회장은 “김 문화원장이 지회 통장으로 매달 200만원씩 보내주고 있다. 인원과 지역을 안배해 경로당 회원들에게 목욕할 기회를 드린다”며 “오랜 세월 변함없이 도움을 주고 계셔서 회원 모두가 깊이 감사해 한다”고 말했다.
-다른 도움도 주고 있다고.
“가끔 경로당을 찾아가 제가 살아온 과정과 요즘 세태를 적당히 섞어 얘기해드리면 좋아들 하세요. 매년 설과 추석에 떡도 보내드립니다. 이번 구정에 전체 경로당 회원들과 소외된 분들이 따뜻하게 떡국을 끓여 드시도록 떡 150 상자를 보내드렸어요.”

▲ 김윤철 문화원장(맨오른쪽)이 관악문화원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문학반 교실에 들러 수강생들과 잠시 한담하고 있다.

김윤철 문화원장의 청소년에 대한 선행은 훨씬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는 지난 2월 2일 불우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 달라며 동아꿈나무재단에 200만 원을 전달했다. 1990년부터 238회에 걸쳐 4억6130만 원을 기탁했다. 동아일보사의 동아꿈나무재단은 그가 처음 기부를 실천한 곳이기도 하다. 부전자전이라고 그의 아들 김대기 고려대 경영대 교수도 같은 날 100만 원을 전달했다. 김 교수의 총 기탁금은 7000만 원(70회)이다.
김 문화원장은 또, 신림본동, 5동의 불우이웃 10명에게 매달 일정액을 지원해주고 있다. 관악구 배드민턴 장학회와 관악산우회 장학회를 설립해 장학금도 주고 있다. 관악문화원도 예외가 아니다. 지자체에서 나오는 예산은 직원 한 명의 인건비에 불과하다. 매년 4000~5000만원씩 자비를 들여 문화원을 꾸려가고 있다.

-한 달에 기부금이 얼마나 되나.
“장학회, 기아대책위원회 등 각종 사회단체에 1500~2000만원이 나갑니다.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하나.
“제가 소유한 건물에서 임대료가 나오고 주유소를 하나 운영해요. 수익금으로 직원들 관리하고 나머지를 보내는 겁니다.”
-돈이 있다 해도 꾸준한 기부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노인회에 전달하는 200만원이란 돈이 요즘 세상에 적지 않은 액수이지요. 이 일이란 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잖아요. 저도 사람인지라 돈을 보면 이번엔 그냥 넘어가자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아예 돈이 제 수중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로 노인회에 전달되도록 자동이체를 해놓았어요(웃음).”
-왜 그렇게 기부를 하나.
“제가 힘든 객지생활을 하며 어렵게 자수성가를 했어요. 고학하면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웠고요. 50세까지 악착같이 벌고 이후에는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제 마음이 편해져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하니까 자식들도 더 잘 되고 복을 받는가 봐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저는 골프도 안하고 등산하고 배드민턴만 해요. 지금도 손수 운전합니다.”

김윤철 문화원장은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게 지고 밭에 나가 일하는 게 너무 싫어 몇 번 가출을 시도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종로의 회사에서 영등포 거래처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약품을 배달하고 수금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 오래 하지 않았다. 결혼 후 부인과 함께 노량진시장에서 옷가게를 열어 많은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밑천으로 건축업, 부동산소개업 등을 하며 신림동 주변의 땅을 사 모았다. 현재 부동산임대업체와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다. 국민훈장 목련장(2004), 국민훈장 동백장(2011) 등 수상. 관악문화원장 세 번째 임기 중이다.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라면.
“서울 올라올 때 아버지가 논 200평을 팔아 마련한 돈의 반은 소를 사고 나머지 반은 저를 주셨어요. 논 한 마지기를 넓히는 건 남 보다 일을 많이 하거나 남보다 더 많이 굶어야 가능했던 시대였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몰라요. 2년 후에 7배(논 1400평)로 갚아드렸어요. 저를 보고 따라서 우리 동네에 가출한 아이들이 많았지만 다들 성공 못하고 귀향했어요.”
-힘들었던 일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노량진시장에서 점포를 할 때 새벽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가게 문을 열었어요. 문이 부실해 소리가 컸어요. 다른 가게 주인이 그 문소리를 듣고 일어나 장사를 시작하면 아침 일찍 오는 손님들을 빼앗기니까요.”
-땅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꼭 논을 사드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토지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했어요.”
-땅을 보는 눈이 남달랐나 보다.
“경험으로 터득하는 거지요. 땅에 대한 투자는 여유자금으로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한번 잘못하면 폐가망신 할 수도 있어요. 대학까지 공부한 이들이 글은 저보다 잘 쓰겠지만 부동산 쪽에선 제가 대학원생 수준일 겁니다.(웃음).”
-관악문화원은 어떤 곳인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문화원이지요. 하루 400~500명의 어르신들이 다녀갑니다. 전통혼례를 치르고 서예‧사물놀이‧문학 등 취미생활을 가르쳐요.”
-문화원장으로서 업적이라면.
“제가 좀 부지런한 편이에요. 1년에 한차례씩 바자회를 열어요. 그것도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니고 보름씩 합니다. 바자회 수익금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씁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를 대절해 전국으로 문화탐방을 다니며 전통문화에 대한 식견을 넓혀요. 외국인을 포함해 전통혼례를 치르고 아이들에게 한복 입혀 부모에게 절하게 하는 등 인성교육도 펴고 있습니다.”
-요즘 노인들이 홀대 받는 것 같다.
“핵가족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노인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그래요. 노인도 대접을 받으려면 젊은이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모임에 먼저 나가 기다리고 앞장 서서 밥값 내고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나와야 해요. 2차는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탄핵 정국을 보고 느끼는 점은.
“일하다보면 실수할 때도 있어요. 잘한 것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것만 보도하는 현상이 안타깝기만 해요. 이 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는 것도 안타깝고… 대통령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5000만 국민도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길 바랄 뿐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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