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이 참으로 음악에 귀가 뜨고 예술에 혼을 뽑힌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미란이 참으로 음악에 귀가 뜨고 예술에 혼을 뽑힌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2.17 14:01
  • 호수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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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23>

현마의 작정으로는 배 떠나는 광경을 보자는 것이었으나 공칙히 배는 벌써 떠나 버린 듯 닿았던 부두 아래편에는 오색의 테이프가 거미줄같이 얼크러진 채 떠 있었다. 남은 정이라고 할까, 그 테이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보지 못한 작별의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먼 바다 밖을 그리는 마음이 일어났다.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받으며 떠났을 배 탄 사람들의 자태가 선해지며 부두 위에 드뭇한 남녀의 그림자는 막 그들을 떠내 보내고 난 쓸쓸한 사람들이 아닐까 보이면서 까닭 없는 슬픈 여정이 솟는다. 그 여정 속에 단주의 그림자가 안개같이 우렷이 묻혀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런 감정 전부가 단주에게 대한 것은 아니었고, 말하자면 또렷이 지목할 수 없는 막연한 감정이었다. 그 막연한 애상을 도리어 향락이나 하는 듯 별일 없으면서도 몇 시간 동안이나 부두를 거닐며 바다를 바라보았는지 현마가 재촉하는 바람에 거기를 떠나 거리로 들어간 것이나 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미란에게는 바다에서 받은 감상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항구는 덮어놓고 슬픈 곳이라는 인상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게 된 것이었으니 이 반날 동안의 해변의 소요가 그날 밤의 음악회에서 받은 감동과 마음의 관련을 가졌던지도 모른다.
“내친 걸음에 음악회에나 갈까.”
충충대는 바람에 따라 나선 것이 알고 보니 천재소녀의 귀국 제일회 공연이었던 것이다. 미란이 음악회에 간 것은 그 밤이 생전 처음은 아니었고 유명한 음악도 허다하게 들어는 왔에도 참으로 음악에 귀가 뜨고 예술에 혼을 뽑힌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음악은 조물주가 보낸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비유가 마음속에 떠오르며 영감이 전신을 휘둘러 쌌다. 소녀는 쇼팽이 장기인 듯 쇼팽의 밤이라고 해서 에튀드, 마주르카, 즉흥곡 등 십여 곡의 연주 곡목이 전부 쇼팽의 작품이었다. 이름을 들었을 뿐인 쇼팽을 미란이 참으로 알게 된 것도 물론 그 밤이 처음이었고 쇼팽의 천재와 아울러 연주하고 해석하는 소녀의 천재가 일종의 무서운 위엄을 가지고 눈앞을 협박해 오는 듯도 했다.
《환상 즉흥곡》의 멜로디는 그대로가 바로 느껴 우는 영혼의 울음소리였다. 폭풍우같이 감정이 물결치다가 문득 잔잔하게 가라앉으면서 고요한 애수가 방울방울 듣는 듯——그렇게 느끼면서 듣노라니 미란에게는 낮에 본 바다 생각이 나면서 항구의 감상이 다시 가슴속에 소생되었다. 가을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다가 한 잎 두 잎 낙엽지는 광경이 떠오르면서 그런 나무 선 바다의 애수를 노래한 것이 그 곡조의 뜻인 듯이도 해석되며 지금 몸이 마치 그런 배경 속에 서 있는 듯 감상 속에 온통 젖어 버렸다. 폴란드의 정서는 왜 그리도 모두 슬픈 것일까. 다음 작품 《배랫 A플랫 작품 47》에서도 미란은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쇼팽의 이름이 가슴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호숫가에 선 옛 성 속에 살고 있는 젊은 기사는 호숫가를 거닐다가 하루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자 첫눈에 사랑하게 되어 장래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얼마 있다 다시 호숫가를 거닐 때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기사는 그 자리로 그 여인을 연모하게 되어 전에 약속한 사람 있음을 잊어버리고 여인의 뒤를 따라 호수 복판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파도가 이는 바람에 기사는 호수 속에 빠져 버리고 만다. 문득 일어나는 조소의 쓸쓸한 웃음의 소리, 그것은 처음에 약속하고 헤어졌던 여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이런 뜻을 가졌다는 그 곡조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듯 애달픈 환상을 눈앞에 떠오르게 했다. 음악은 원래가 환상을 가져오게 하는 요술쟁이다. 피아노 속에는 조그만 우주가 들어앉고 사람의 혼이 숨어 있어서 가지가지 세상의 그림과 감정이 임의로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악마같이도 새까만 요술쟁이 앞에 앉아서 그 조그만 우주를 마음대로 번국질하고 사람의 혼을 멋대로 울려보는 흰옷 입은 천재는 천사의 모양이 아닐까. 비스듬히 고여 놓은 피아노의 뚜껑은 흡사 새 날개도 같고 배의 키와도 같다. 새까만 날개를 타고 혹은 키를 저으면서 소복한 천사는 하늘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우주를 모방하고 영혼들을 흠뻑 울리는 것이다. 사실 미란의 영혼은 남몰래 흑흑 느껴 울었다. 그렇듯 감동이 회오리바람같이 마음을 저어놓았고 음악과 천재의 생각이 전신을 난도질해 놓아서 마음과 몸이 감격과 피곤 속에 폴싹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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