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화에서 모티브… 소녀들의 탈출시도 땀 쥐게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빌리 밀리건이란 남자가 3명의 여대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된다. 증거가 명확했기에 유죄가 확실했다. 하지만 이듬해 이 남자는 풀려난다. 일명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인정돼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이다. 무려 24개의 인격이 한 사람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최근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2월 22일 개봉한 ‘23 아이덴티티’ 이야기다.
‘23 아이덴티티’는 케빈(제임스 맥어보이 분)이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소녀들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자란 케빈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는다. 그의 몸속에는 본래의 인격인 케빈 외에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배리, 강박증이 심한 데니스, 미스터리 여성 패트리샤, 9세 소년 헤드윅, 역사에 해박한 오웰, 당뇨병을 앓는 제이드 등 무려 23개의 인격이 있다. 케빈과 다른 인격들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만의 규칙을 정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케빈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던 24번째 인격의 지시로 세 명의 10대 소녀를 납치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위치불명의 아지트에 감금한다. 소녀들 중 두 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을 시도하다 케빈에 의해 격리된다. 반면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 분)는 케빈이 다중인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케빈의 인격들을 이용해 돌파구를 찾고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선다.
갑자기 납치돼 밀폐된 공간에 갇힌 3명의 소녀가 케빈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단순한 줄거리지만, 영화는 감독의 섬세한 연출에 힘입어 끝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1999년 개봉한 ‘식스 센스’로 반전 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한동안 부진했던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재기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를 완성케 한 건 제임스 맥어보이의 놀라운 연기다. 그는 성별부터 연령, 말투, 제스처까지 모두 다른 여러 인격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패트리샤의 가냘픈 손짓과 음흉한 웃음, 어린아이의 말투를 가진 헤드윅 등은 모두 그의 연기에서 비롯된다. 특히나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변환하는 장면이 일품이다. 각각의 인격에 따라 의상을 갈아입고, 말투와 목소리뿐만 아니라 근육의 표현까지 달리해 마치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클로즈업에서 빛을 발한다. 어둠에서 무언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치보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더 관객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한정된 공간과 적은 수의 등장인물이 주는 단조로움 등 작품의 아쉬운 부분은 케빈과 또다른 인격들이 빈틈없이 메운다. 배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