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마의 우악스런 힘에는 당하는 재주 없이 기어코 입술을 받아 버리게 되었다
현마의 우악스런 힘에는 당하는 재주 없이 기어코 입술을 받아 버리게 되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3.24 11:18
  • 호수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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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28>

이튿날 아침 미란은 천연스럽게 자기 방에서 일어나 나오는 현마를 보았다. 현마는 좀 어색한 듯 벌겋게 충혈된 눈에 미란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궁싯궁싯 제 혼자 움직였다. 각각 늦은 아침을 먹고 난 뒤 미란이,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피아노 사는 날예요.”
현마는 비로소 제 기색을 돌리면서 데설데설 표정을 펴간다.
“간밤 약속을 이행하겠단 말이지.”
“선물도 받기 전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요.”
“아무렴, 아무렴.”
괴덕을 부리는 바람에 미란도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일상의 스스럽지 않은 공기를 회복했다.
“자, 얼른 와서 경의를 표해. 경의를 표한 담에야 사 줘두 사 주지.”
말을 그렇게 듣고 보면 도리어 쑥스러워지며 몸이 굳어 간다. 천연스러운 방법은 없을까. 차라리 그렇지 못하다면 그편에서 자진적으로 그것을 요구해 왔으면——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얼 망설여. 어느 때까지.”
현마는 능걸치게 웃으면서 짜장 자진적으로 나서며 미란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미란은 몸의 힘을 풀고 끌려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맡기는 듯 온순한 태도를 지녔으나 약속대로 이마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어릿거리는 서슬에 지나치게 되어 현마의 우악스런 힘에는 당하는 재주 없이 기어코 입술을 받아 버리게 되었다. 전광석화같이 오는 폭력에는 어쩌는 도리 없이 커다란 품 안에서 비둘기같이 움츠리고 약속의 한계를 넘어 순간의 자유를 뺏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이 놓였을 때 미란은 죽지를 비틀린 비둘기같이 이지러진 몸을 털면서 일종의 노기가 솟아 현마의 뺨을 갈기고 싶었으나 기왕의 약속을 생각하고 마음이 풀리기는 했다.
“실례가 아니예요. 뺨이래두 갈길까 했어요.”
“생판 모르는 귀부인이라구.”
“폭력은 야만이거든요.”
“왜 그런 인사의 법은 없는 줄 아나.”
느물거리며 대꾸는 했으나 실상인즉 마음속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간밤의 숨은 행동을 생각하고 더럽혀진 자기의 몸과 순결한 미란의 몸을 대조하게 될 때 누추한 자격으로 신성한 것을 겨누고 범한 듯 부끄러웠다. 사람이 관대한 때는 반드시 죄를 진 때다. 현마는 허물을 지우려는 듯 그 어느 때보다도 그날은 관대해진 듯했다.
“내가 무례했거든 대신 내게 무례한 청을 좀 해 보지.”
득실은 언제든지 상반되는 것, 미란은 도리어 다행한 듯 뽀로통하던 노기를 풀고 그러나 결코 기뻐라 날뛰는 법 없이 침착한 절도를 지니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주인인 척 현마의 앞을 선다.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것 골라 보라니까.”
당연한 보수인 듯 현마가 충충대는 바람에 미란은 마음이 참새같이 뛰었다. 사실 아침의 그 조그만 변괴 때문에 그날의 장사는 미란에게 얼마나 유리했는지 모른다. 그의 의견이 첫째였고 현마는 허수아비같이 옆을 따를 뿐이었다. 성공된 그날의 거래로 미란은 아침에 받은 욕쯤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악기점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비위에 맞는 피아노를 선택할 자유를 도맡게 되자 담이 허랑하게 커지면서 몇 군데를 거치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을 때 두말없이 그것으로 결정된 것은 물론이다. 조금 낡기는 했으나 베히슈타인 회사의 제작이라는 것이 마음을 댕겼다.
“이천 원이면 외국치로서야 싼 폭이죠 뭐.”
현마도 반드시 그 값에 놀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과즉 칠팔백 원의 것에 만족하리라고 생각한 것이 곱절의 것을 잡은 것이 의외였고 아침의 그 인사의 값이 이천 원임을 생각할 때 입맛이 얼마간 떫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뭘 그래요. 만 원짜리가 있을야니요.”
별수 없이 현마는 큰 염낭이나 보이는 듯 선뜻 그것으로 결정하는 수밖에는 없었으나 막상 그것을 흥정하러 들 때 한 가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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