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훈 “지난 70년 간 사회의 ‘갑질’에 희생 당하는 개인을 그렸어요”
작가 김훈 “지난 70년 간 사회의 ‘갑질’에 희생 당하는 개인을 그렸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3.31 13:38
  • 호수 5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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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여 만에 장편소설 ‘공터에서’ 펴내

소설 속 인물은 나라 잃고 방황하는 유랑청년이었던 아버지가 모델
죽음은 자연현상… 그러나 예순 넘기니 죽음을 생각하면 진땀나기도

▲ 사진=해냄출판사 제공

‘칼의 노래’‧‘남한산성’‧‘흑산’의 작가 김훈(69)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최근 ‘공터에서’(해냄)란 장편소설을 펴냈다. 마씨 부자의 일대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1920~1980년)의 굴곡진 면들을 담담하고 진솔한 문체로 그려내 호평을 받고 있다. 소설은 어느 정도 작가의 개인사와 닿아 있기도 하다. 근황과 함께 신작 얘기를 물었다.

-한동안 뜸했다.
“그동안 글 쓰는 게 매우 저조했어요. 몸이 안 좋았어요, 특별히 아픈 데가 있는 게 아니라 노화가 온 겁니다. 글을 쓰기가 싫었어요. 가끔 단편과 에세이를 쓰며 살았어요. 올해부터는 정신 차리고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공터에서’는 무얼 말하고 싶었나.
“제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에요. 지난 70년간 우리 사회의 유구한 전통은 ‘갑질’이란 걸 새삼 깨달았어요. 한국전쟁 때도 피난민들은 줄지어 부산까지 걸어가는데 고관대작들은 군용차와 관용차를 징발해 응접세트와 피아노를 싣고 피난민 사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질주해 갔지요. 그런 ‘갑질’이 지금까지도 악의 유산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이 주는 의미는.
“공터란 주택과 주택 사이의 버려진 땅이에요. 아무런 역사적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될 만한 건물이 들어서 있지 않은 곳이지요.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공터로 본 것입니다. 앞으로 무언가 지어야할 땅인 셈, 돌이켜 보면 70년 동안 가건물 위에서 살아왔다 싶고, 그런 비애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소설 속 아버지는 실제로 작가의 아버지가 모델이라고 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와 그 시대 다른 많은 아버지를 합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속의 아버지 ‘마광수’는 상하이에서 한인 망명자 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고 나서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떠돈다. 작가는 부친 김광주에 대해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는 없고 아버지가 그렇게 주장하고 다녀서 그렇게 알려졌다”라며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유랑청년 중 하나였다. 그 유랑의 모습이 내 소설에 그려져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가 3년여 만에 물 위로 올라왔다. 세월호에 대한 소설을 구상 중이라고.
“세월호 얘기는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자료는 아주 아주 많이 읽었지만 세월호를 소설로 쓰자면 변형시킬 수밖에 없어요. 세월호 참사 다음날 자살한 교감을 떠올렸어요. 인솔 책임자로 다음날 아침에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던 분입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써야 하나. 그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 종교의 영역으로까지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요.”
-촛불‧태극기 집회를 어떻게 보나.
“조카들이 촛불집회에 나가자고 했을 때 감기가 걸렸다고 하고 안 갔어요. 친구들이 태극기집회에 나가자고 했을 때도 감기 걸렸다고 하고 안 나갔지요. 대신 연말에 관찰자 입장에서 두 번쯤 가서 양쪽을 다 기웃거렸어요. 해방 후 70년이 지났지만 엔진이 공회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서울 출생인 김훈은 중‧고등학교를 서울 도심에서 다녔다. 그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에 나갈 때 학생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했다. 지금 시위를 하는 그 거리에서다. 그때 태극기를 들고 교통 통제한 그 길에서 반나절을 기다렸다. 남학생들은 가로수에 소변을 봤고 여학생들은 그저 참으라는 말만 들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태극기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집회 현장에서 “내가 정말 너무 오래 사는 거 아닌가.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비애가 들었다”고 말했다.

김훈은 고려대를 중퇴하고 신문사에 들어가 27년여 기자생활을 했다. 그가 쓴 기사들은 초짜기자들의 교과서 역할을 했을 정도로 문장과 구성이 뛰어났다.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2001년)을 수상했다. 첫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문학상(2004년)을,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2005년)을 잇따라 수상했다. ‘자전거여행’ 등 7권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원고를 컴퓨터가 아닌 연필로 쓴다.

-왜 작가가 됐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재벌회사에 취직해 밥벌이를 하려는 아주 실용적인 목표를 가졌어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에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을,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에요. 나의 내면에는 말하기 어려운 억울함, 짓눌림, 슬픔, 고통 그런 게 있어요. 이 사회에서 살면서 억압된 것들이 있지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드러내보고 싶은 게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어요.”
-소설에 대한 열정은 어디서 오나.
“전 예술적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노동의 정신으로 글을 써요. 어떤 이들이 영감으로 글 썼다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영감을 믿지 않아요.”
-소설가가 된 후 어떤 변화가 생겼나.
“생각보다 책도 좀 팔렸고 애들이 다 직장 구해 집을 나갔고 아내는 여행 열심히 다니고 대부분 집에 홀로 있습니다. 토굴을 지키는 스님 같이, ‘혼자 있음’의 존엄을 즐기고 삽니다. 우리 사회 병리현상의 상당 부분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해 생기는 것 같아요. 외롭다는 핑계로 파당을 만들고 추저분한 짓을 하는 것이죠.”
-‘칼의 노래’ 등은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 때 이야기잖아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고요. 조선의 가장 참혹한 전쟁에 대해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 뜻은 어느 정도 이룬 것이죠. ‘흑산’은 천주교 박해의 야만성을 말한 겁니다,”
-요즘 세상을 어떻게 보나.
“예전에는 밥이 없었는데 지금은 밥이 넘치고 자동차가 가득합니다. 역사책을 보니깐 삼국~조선 거의 매달 굶어죽는 사람이 나왔어요. 그 흐름이 내가 고교 다닐 때까지 유지됐어요. 우리는 이 나라를 밥 먹는 나라로 바꿔 놓는 과정에서 수많은 악, 비리, 차별을 양산했습니다. 그게 구조적 악으로 깔려 있어요.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린 희망이 없어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는가.
“죽음이라…. 전에는 죽음을 자연현상이라고 봤어요. 해가 지면 날이 저무는 것과 같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애도할 것도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봤어요. 그건 문학적 허세였습니다. 예순을 넘기니 죽음을 생각하면 솔직히 진땀이 납니다.”
-자전거를 즐겨 탄다.
“저는 기계 혐오증이 있어서 자동차도 카메라도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오직 자전거 외에는 없습니다.”
-‘라면을 끓이며’(2015년)라는 에세이집에서 라면 끓이는 비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예요. 센 불을 쓰면 실패하지 않아요.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 스프는 보조로 삼아요. 스프는 3분의 2만 넣습니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갰다가 라면이 2분쯤 끓을 때 넣어요. 파를 넣은 다음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 정도 더 끓입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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