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올 한올 짜서 쌓아올린 태피스트리의 매력
한올 한올 짜서 쌓아올린 태피스트리의 매력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3.31 13:50
  • 호수 5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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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송번수:50년의 무언극’ 전
▲ 송번수(74) 작가는 5mm의 실을 한올 한올 쌓아올려 만든 '태피스트리'를 통해 한국현대섬유미술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송 작가의 대표작 ‘공습경보’(1974), ‘이라크에서 온 편지’(2006), ‘상대성 원리’(1988·왼쪽부터 순서대로).

판화‧종이부조‧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기법 통해 사회 부조리 고발
폭탄테러‧일본대지진 담은 ‘이라크에서 온 편지’, ‘2011.3.11.’ 등 눈길

경기 광주시 능평성당 제단에는 십자가상 대신 한 장의 태피스트리(다양한 색실로 짜 회화적인 무늬를 내는 직물)가 내걸려 있다. 가로세로 4m에 달하는 대형 태피스트리에는 끝이 이어지지 않은, 미완성 된 면류관이 새겨져 있다. 한국 현대섬유미술에 한 획을 그은 작품 ‘미완의 면류관’(2002)은 성당을 찾는 많은 신도들에게 종교와 죄의 의미를 묻고 있다. 송번수(74) 작가가 한올 한올 쌓아 올린 태피스트리가 미술과 종교의 접점에서 깊은 감동을 준 것이다.
원로 섬유공예가 송번수의 대규모 개인전이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다. 6월 18일까지 과천관 제1전시실과 중앙홀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송 작가의 초기 판화작품부터 최근작까지 전 생애 작품 100여점을 총망라한다.
1943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난 송 작가는 어린 시절 한국화가 민경갑, 조각가 최종태 등과 인연을 맺으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0년 대전문화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화단에 나왔다. 이후 홍익대 미대 공예학과에 진학해서 스승인 유강열에게 염직과 판화 기법을 배웠다. 프랑스 유학후 귀국해서는 모교인 홍익대에서 교수 및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섬유공예 전문 마가미술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송 작가는 하나의 기법과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과 모색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왔다. 판화, 태피스트리, 종이부조 등 반세기에 걸쳐 다양한 소재를 통해 전쟁과 재난,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종교적 메시지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뤘다. 특히 그의 태피스트리는 2001년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 태피스트리 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시의 첫 구역인 중앙홀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대표적인 판화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1960년대 판화작가로 화단에 등단한 그는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된 ‘판토마임’, ‘공습경보’ 시리즈 등을 제작했다. 이중 ‘공습경보’ 시리즈는 방독면을 쓴 사람의 얼굴을 다섯 단계의 원색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사회 전체가 공습’이란 메시지를 던진다.
송 작가는 197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 작가로서 전환점을 맞는다. 판화작가로 입지를 굳힌 그는 석판화를 배우기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났고, 이후 작품의 대표 소재가 된 가시와 태피스트리 기법을 만났다. 이후 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있는 고국의 현실을 꽃잎 없이 가시만 남은 ‘장미’(La Rose) 시리즈로 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태피스트리 작품을 선보였다.
제1전시실에선 그의 대표적인 태피스트리를 볼 수 있다. 태피스트리는 유화와 달리 5㎜ 실을 일일이 손으로 짜는 고된 작업을 통해 탄생한다. 실과 실이 이어지는 이음매에 십여 가지 색깔이 만나 그라데이션을 만든다. 한 번 어긋나면 돌이킬 수 없는 작업이라 실수하면 칼로 자르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1년에 달한다. 그가 50년간 선보인 태피스트리가 70여점밖에 안 되는 이유다.
이중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전해지는 자살폭탄테러와 같은 비보를 접하면서 제작한 태피스트리 작품 ‘이라크에서 온 편지’(2006)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 경험하고 제작한 ‘2011.3.11.’(2011)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대형 태피스트리가 볼 만하다. 또한 촛불집회때 그린 ‘조국의 여명’(2016)은 산 능선을 뚫고 나온 가시들이 떠오르는 태양에 빛나는 모습처럼 보이는데 한국 사회에 비칠 서광처럼 다가온다.
또한 태피스트리 기법의 변천사를 살필 수 있는 1980년대 제작한 ‘생의 오케스트라’와 ‘상대성 원리’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기법은 이후 섬세한 묘사와 명암의 그라데이션 표현으로 발전하면서 송 작가의 특유의 가시를 담은 대형 태피스트리를 탄생시켰다.
송 작가는 1993년부터 ‘우주-빛이 있으라’ 연작과 ‘미완의 면류관’ 등을 통해 종교적 주제의 태피스트리도 제작해왔다. 전시장 마지막에 소개된 ‘너 자신을 알라’(2007)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십자형 가시가 불타는 장면을 담은 작품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안고 있는 가시들을 불태워 없애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송번수 작가는 한국 현대 섬유예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동안 대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송번수의 면모를 조명하고 재발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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