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경로당의 변화를 이끄는 막내회원들
[창간기획]경로당의 변화를 이끄는 막내회원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4.07 10:58
  • 호수 5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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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텃세에 시달리고 경로당 살림 도맡아 힘들지만 살맛 나요”

최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경로당은 60대 회원의 가입률이 저조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로당에 가입했다가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선배들의 수발을 들거나 일부 회원들이 텃세를 부려서 못 버티고 떠나는 60대도 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로서 경로당 회원으로 가입해 경로당의 변화를 이끄는 60대들도 있다. 본지에서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60대 회원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64세 때 특별회원으로 가입… 지금은 노래하는 맥가이버
인천 서구 두밀경로당 김경익(65) 씨

“봉사활동을 하다가 대한노인회를 알게 됐어요.”
김경익(65) 씨는 15년 전부터 ‘검단노래사랑회’라는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주일에 두세 번 요양원이나 무료 급식소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한노인회와도 인연이 닿아 3년 전 대한노인회 인천연합회 자원봉사클럽 특별회원이 됐다.
하지만 경로당 문턱을 넘기까지는 더 시간이 걸렸다.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텃세 때문이었다. 김 씨는 “전임 경로당 회장이 65세 미만 특별회원의 활동을 막아서 경로당 활동은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경로당과의 인연을 포기하지 않고 가입요건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 자신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던 회장이 바뀌었고 김 씨 역시 당당하게 정회원이 되면서 경로당 살림을 적극적으로 맡기 시작했다.
두밀경로당은 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따라 20분가량 걸어야 도착할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 주변에 30여 가구밖에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인데 김 씨는 이곳에서 없으면 안 될 존재다. 맥가이버로 불릴 정도로 궂은일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부터 마을 통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손재주가 좋은 김 씨는 경로당 곳곳을 매일매일 관리하고 있다. 전등 교체부터 경로당에 없는 화장실까지 만들어냈다. 어르신들이 용변이 급해도 건물을 돌아서 멀리 있는 곳까지 가야했는데 김 씨가 구청에 건의해 경로당 앞에 간이 화장실을 설치한 것이다. 다만 수세식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었다. 이 역시 김 씨가 솜씨를 발휘해 변기를 개조하면서 해결됐다. 또한 4월 초에 깨끗하게 교체한 경로당 현판도 김 씨가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다.
또한 김 씨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발이 되고 있다. 외진데 있다 보니 거동이 불편한 회원들이 자주 찾지 못했다.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해도 다 모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빠지는 회원도 많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 씨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회원들의 불편함을 덜어줬다. 김 씨는 “자동차로 일일이 회원 한분 한분을 태워서 경로당으로 모셔오면서 경로당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폐쇄적으로 운영됐던 경로당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경로당에 사람이 많이 올수록 좋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검단노래사랑회 회원들도 자주 경로당에 찾아와 김 씨의 노력에 힘을 보태고 있다. 김 씨는 “좀더 많은 특별회원이 경로당을 찾아서 활성화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은진 기자


65세에 회장으로 영입돼… 수완 발휘, 텅빈 경로당 곳간 채워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1경로당 한황(68) 회장
80명에 이르는 회원들에게 매일 부식과 간식을 제공하고 365일 개방하면서도 매년 경로당 운영기금을 1000만원씩 적립하는 경로당이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1경로당 이야기다.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회원들에게 회비를 걷는 것도 아니다. 회원들이 손수 900평 논을 임대해 감자 배추를 재배하고, 새우젓 등 각종 농산물을 판매해 이룬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의 시작엔 65세 때 경로당 지도자로 ‘스카웃’ 된 한황(68) 회장이 있었다.
한 회장이 경로당 회장을 맡았을 때 관산1경로당의 상황은 심각했다. 한 회장은 “회원수는 많지만 운영비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운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자체에 여러 차례 민원도 넣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한 회장은 오랜 시간 농부로서 살아온 경험을 발휘해 묘안을 짜냈다. 얼마 남지 않은 경로당 기금을 활용해 운영기금을 조성한 것이다.
한 회장은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먼저 한우 한 마리를 구입해 이를 도축해 경로당에서 판매했다. 신선한 소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점과 한 회장의 평소 신망 덕분에 구매자가 몰렸고 하루 만에 품절되는 일이 벌어졌다.
회원들에게 소고기를 한 근씩 나눠주고도 150만원의 수익을 낸 한 회장은 좀더 적극적으로 기금 조성을 시도했다. 인근 900평 논을 임대해 무와 배추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전남 무안산 양파를 대량 구매해 약간의 이윤을 붙여 판매했고 김장철을 맞아선 재배한 무와 배추 그리고 새우젓을 대량 구매해 판매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후배 8명을 특별회원으로 영입해 고령인 선배 회원들이 할 수 없는 궂은일을 맡겨 운영의 효율성도 높였다. 한 회장은 “매년 1000만원 이상 기금을 적립해 현재는 운영기금을 4000만원까지 불린 상태”라고 말했다.
한 회장의 최종 목표는 관산1경로당이 ‘베푸는 경로당’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 회장은 매번 장터를 열 때마다 단순히 팔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회원들에게 해당 농산물을 나눠주는 것은 기본이고 지난해 김장철에는 1톤에 달하는 김장김치를 담가 지역 독거노인들에게 10kg씩 나눠주기도 했다.
한 회장은 “과거처럼 받기만 하려고 하면 경로당은 망한다”면서 “이제는 지역사회 모범이 되도록 베푸는 경로당이 되야 한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 이이순 사무장(왼쪽 아랫줄 첫번째)과 경로당 회원들

음료봉사로 경로당 출입
선배들 설득해 갈등 해결

서울 강서구 수명경로당 이이순(67) 사무장
서울 강서구 화곡3동에 위치한 수명경로당. 1990년 준공된 이 경로당은 한 때는 많은 회원을 거느렸지만 2000년대 들면서 하루 방문 회원이 3~4명도 되지 않을 만큼 쇠퇴했다. 회원 간 갈등으로 상당수 노인들이 경로당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인근 공원 벤치로 내몰리는 일도 벌어졌다. 이로 인해 경로당을 없애고 공원을 확장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수명경로당이 한 ‘막내 회원’ 때문에 달라졌다. 수용 가능한 최대 인원을 채워 더 이상 회원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활성화 된 것이다. 최연소 회원인 이이순(67) 사무장이 바꾼 변화였다.
“2005년부터 8번에 걸친 무릎수술을 받은 뒤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다짐했는데 때마침 선배님들을 알게 됐어요.”
이 사무장이 경로당과 연을 맺게 된 건 2010년이었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던,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선배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산책 중 매일 마주치면서 20년 이상 나이가 많은 선배들과 안면을 튼 그는 서서히 그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다 미숫가루를 비롯한 각종 음료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이 사무장은 “선배님들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라는 뜻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년간 ‘음료봉사’를 해오던 그는 어느 날 공원에 선배들이 한 분도 없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으로 인근 수명경로당을 찾게 됐다. 이후 이 사무장의 음료봉사는 경로당으로 이어졌다. 이 사무장이 매일 경로당을 찾자 회원들은 회계업무를 비롯해 각종 경로당 업무를 그에게 부탁했다. 이를 계기로 2014년 특별회원으로 경로당에 가입했고 이듬해부터는 정회원으로 전환해 활동 중이다.
사무장이란 직함을 맡아 일을 시작하게 됐을 때 경로당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회원 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다툼도 자주 발생했고 이로 인해 경로당이 아닌 주변 공원에 머무는 회원들이 더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사무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혼자 살거나 집에서 가족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곳이 경로당 밖에 없었던 것 같다”면서 “공동생활의 규칙을 어기고 고집을 부리는 일이 벌어져도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타일렀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무장은 매주 월‧수‧금 함께 하는 점심을 도맡았고 매일 제공하는 각종 간식도 혼자서 준비하는 등 헌신적으로 경로당 살림을 이끌었다. 그의 헌신으로 경로당 내 갈등은 사라졌고 10평 남짓한 경로당에 매일 20~30명씩 회원들이 오면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회원들이 늘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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