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레같이 피아노의 건반이 고함치더니 광상곡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레같이 피아노의 건반이 고함치더니 광상곡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4.07 13:42
  • 호수 5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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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30>

어이가 없어 뻣뻣이 섰던 사람들은 요번에는 곡조에 취해서 여전히들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가늘고 미묘하고 조금 슬픈 그 곡조를 미란은 그 역 쇼팽의 것일 듯——쇼팽의 마주르카의 한 곡조쯤일 듯 짐작하면서 청년의 기술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모르는 척 비웃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열중되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솔직하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는 없었다. 미란은 간밤 소녀에게서 받은 흥분을 마음속에 되풀이하면서 청년을 고쳐 보기 시작했고 일종의 경의조차 바치는 것이었으나 곡조가 끝나고 다시 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을 때에는 전신의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하며 그 교만한 태도에 경의는 금시 경멸로 변했다. 얄밉고 무례한 것, 네 재주가 몇 푼어치가 되든 간에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은 밑질 것 없다. 피아노는 내 것이다, 내 것이 되어야 한다——마음속에 굳게 주장하면서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 현마의 팔을 흔들었다.
“소리 제법 괜찮죠. 어서 사요.”
현마가 정신을 차리고 점원들의 얼굴을 살펴볼 때 한 사람은 청년 앞에서 손을 비비면서,
“미안하지만 사정이 이러니 단념하시구 다음 기회나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고는 현마를 안내해서 안쪽으로 걸었다.
“물건을 주면 재주를 뺏구 재주를 준 데는 물건을 애끼구——세상일 공평한지 불공평한지……”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현마는 입 밖에까지 내버리고 말았다.
“거문고를 나귀에게 주려고 한다. 나귀에게 거문고를 주려고 한다.——어리석은 무리들이……”
새까만 피아노의 가슴에다 자기의 모양을 비취면서 그것을 내 것인 양 덤석 안으며 외치는 청년을 미란은 요번에는 자기의 차례인 듯 교만한 눈초리로 굽어보면서 대거리나 하려는 듯 한마디 쏘아붙였다.
“조물주는 천재를 맨들어 놓고는 제 스스로 그것을 질투한다든가. ——어서 거문고는 나귀나 가져갈 테니 재주 있는 준마는 탄식이나 해요.”
돌아보지도 않고 현마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 때 우레같이 피아노의 건반이 고함치더니 폭풍우나 쏟아지는 듯 광상곡의 구절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아침의 한 장면이 우연히도 미란에게는 큰 자극을 주어 불같은 열정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청년에게서 받은 모욕이 간밤에 소녀에게서 받은 감동과 합쳐서 절대적인 결의를 주었다. 나귀의 신세를 면하고 준마의 세상에 속할 수 있도록——될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나서 첫걸음부터 시작하고 싶었으나——때늦은 것을 탄식하면서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을 마음속에 맹세했다. 예술이 제일이요, 창조가 제일이요, 천재가 제일이요——그 외의 모든 일은 우둔한 나귀의 세상일 같이만 생각되면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굳세게 마음속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두말할 것 없이 말썽 많은 피아노를 사서 고향으로 부치도록 하고 났을 때 미란은 마음의 고리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며칠 동안에 마음이 여러 길이나 자라난 듯 불과 열흘 남짓한 이번 여행이 여러 달이나 지난 듯한 마음의 변화를 느꼈다. 확실히 집을 떠날 때의 마음은 아니었다. 불안정하고 안타깝던 상태가 안정한 한 줄기의 길을 찾고 혼돈한 세계가 빛을 찾는 동안에 어린 마음이 여러 길 활짝 자라난 것은 사실이었다. 작정된 길을 위해서 이제는 벌써 집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얼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활의 첫걸음을 떼어 놓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차 갔다. 여행을 재촉하고 피아노를 조르던 미란은 이번에는 하루바삐 동경을 떠나기를 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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