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형 중남미문화원 원장 “중남미 신임대사들 만찬 장소로 쓰일 때 보람 느껴요”
이복형 중남미문화원 원장 “중남미 신임대사들 만찬 장소로 쓰일 때 보람 느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4.21 13:51
  • 호수 5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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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형 중남미문화원 원장이 마야문명의 상형문자를 형상화한 벽화 앞에서 박물관 전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27년간 중남미 외교관 활동하며 문화재, 공예품 등 3000여점 수집
박물관‧미술관‧조각공원‧종교관‧벽화 등 갖춰… 음악회‧전시회도 열어

“개인 박물관 중에 이만한 곳은 없을 겁니다.”
중남미문화원의 이복형 원장(86)은 “국가 또는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미술관 등을 제외하곤 가장 탄탄하게 운영이 되는 곳”이라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했다.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위치한 이 문화원의 박물관, 미술관에는 이 원장이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에서 30년 가까이 외교관으로 지내는 동안 사 모은 가면, 목기, 가구, 공예품 등 3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최근에는 현대작품을 전시한 조각공원과 종교관, 마야문명의 상형문자를 새겨놓은 벽화까지 갖춰 볼거리가 더 많아졌다. 이복형 원장에게서 문화원을 짓기까지 흘린 땀과 보람을 들었다.

-건물들이 멋지고 조경도 아름답다.
“이곳에 있는 단풍이나 목련은 50년 전 묘목을 가져다 심은 거예요. 목련 꽃잎은 미끄러워 사람이 밟으면 다치기 쉬워요, 새벽에 일어나 목련꽃 다 쓸어냈어요. 사다리 타고 올라가 향나무들 전지작업도 해주어야 하는데…. 집사람(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이사장‧84)이 떨어지면 다친다고 못하게 해요. 집사람이 장시간 외출한 사이에 전지작업을 하기도 해요.”
-문화원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은퇴하면 농장이나 하겠다는 생각으로 1950년대에 땅을 사두었어요. 김신조가 청와대 습격하러 온 이후로 공비들이 온다고 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땅입니다. 평당 300원에 나무가 1~2원 하던 시절이었어요.”

▲ 최근에 멕시코에서 들여온 종교관 제단. 8개로 쪼개서 들여온 후 다시 조립해놓았다.

서울 출신의 이복형 원장은 6‧25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1967년 멕시코 1등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도미니카‧아르헨티나‧멕시코 대사를 지냈다. 부인과 함께 짬나는 대로 그 나라의 문화재, 공예품들을 모았다.
1994년 퇴임한 이 원장은 은퇴 후에도 전문성을 살려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박물관을 떠올렸다. 건물의 설계와 내부 인테리어, 조경 등 박물관 준비에는 부인 홍갑표 이사장이 앞장 섰다. 차도 다니지 않던 시절, 마을 이장 집에 방 하나 얻어 군불 때가며 나무를 심었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도 홍 이사장은 가난한 나라의 외교관 부인으로서 혼자 파티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어 각국 대사들을 대접하는 등 숱한 고생을 했다.
이 원장은 “‘아내가 지금까지는 남편 춤에 맞춰 춤을 췄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춤에 제가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수집 과정에 에피소드도 많았겠다.
“옥션이나 국영 경매에 가서 조각품, 가구를 사들였어요. 1985년 아르헨티나 대사할 적에 잘 살던 나라가 갑자기 흔들렸어요. 그때 대리석 조각 열댓 개는 횡재하다시피 주웠지요. 저는 비싸지 않은 가면을 샀고 집사람은 큰일만 생각했어요. 전 재산을 쏟아 부었지요. 아직도 은행 빚이 남아있어요. 그런데도 집사람은 이걸 법인화 했어요. 이 땅은 문화기반시설이라 누구도 손을 못 대요.”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딸은 외국에서 살고 아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어요.”
옆에 있던 부인이 “3대째 가서 다 팔아먹을 걸 왜 물려줘요”라며 거들었다.
-산 일부가 조각공원이다.
“산책로 따라 걸으며 중남미 현대작가들이 기증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요.”
-종교관 내부도 훌륭하다.
“아내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7세기 남미의 바로크 스타일의 성당을 본 따 아내가 직접 설계를 했어요. 내부 제단은 멕시코의 소유주가 팔지 않겠다는 걸 4년여 설득한 끝에 8등분해 들여와 다시 맞춘 겁니다.”
-전시회도 열린다고.
“옛날 물건만 갖다놓으면 박물관 구실을 못해요. 우리나라 최초로 쿠바 화가의 작품 전시회를 비롯해 멕시코 화가 ‘움베르토 파카’의 판화전 등 전시회를 가졌어요. 자선 음악회도 24회 개최했고요.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멕시코 고전연주자가 이곳에서 즉흥 연주를 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어요.”
특강도 열린다. 이 원장은 작년 11월, 서울대 국제대학원의 외국인 대학생 40여명을 대상으로 한국과 중남미 국가의 관계에 대해 영어로 특강을 했다.

이 원장은 “직원 11명을 두었지만 스페인어를 아는 이가 없어 내가 직접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검색하고 중남미 국가의 문화단체들과 교신해 전시도록을 만들기도 한다”며 “너무 바빠서 치매 걸릴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노인 관광객도 많이 오는가.
“노인복지관에서 단체로 많이들 와요. 노인들은 20% 할인해줍니다.”
-관리의 어려움이라면.
“미국의 뉴욕미술관에 가보면 할렘에서 선생님 따라 온 아이들이 조용했어요. 여기선 애들이 꽃을 뜯는데도 선생님이 가만히 있어요. 물론 그림에 조금 손을 댈 수는 있지요. 그런데 아예 손을 대고 비벼요. 그럼 ‘야, 이놈아’ 하고 소리 지르지요. 다음날 인터넷에 올라와요. ‘입장료 받았으면 됐지, 어떤 영감이 왜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냐’고요.”
-대사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첫 번째로 관계를 맺은 나라가 멕시코였어요. 1968년 19회 올림픽을 그 나라에서 개최하는데 북한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일을 맡았어요. 북한보다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UN 총회가 열리면 회원국들에게 표 달라고 사정하곤 했어요.”
-퇴임 후에도 민간외교관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2002년 월드컵 한국 유치를 위해 정몽준 회장하고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 앞줄에 있는 이들은 다 저 세상 사람이 됐어요. 여수엑스포,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도 중남미 국가를 찾았어요.”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은 쇠퇴하고 있다.
“그네들은 과거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아르헨티나는 1950~60년대 포드‧폭스바겐 등 자동차를 조립해 50만대 생산하고 멕시코는 1968년에 미국까지 고속도로를 놓을 만큼 앞선 국가들이었어요. 병원에서 출산은 무료였고 선생 2명이 열댓명 놓고 가르칠 정도로 사회복지가 잘 된 나라였지요. 그런 복지를 이어가다보니 경제가 어려워진 거지요. 식민지 때부터 가진 이들이 부를 독점해 빈부 격차가 아주 심해요. 그래도 땅 넓고 자원이 풍부해 저력이 있어요.”

이복형 원장은 인터뷰 말미에 “남미로 가는 외무부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하고 새 대사들 부임하면 여기서 만찬한다”며 “남들은 이제 좀 편하게 살라고 하지만 내가 아직 나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그게 보람이고 작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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