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은 앞에 선 영훈의 자태에 놀라면서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미란은 앞에 선 영훈의 자태에 놀라면서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4.28 13:28
  • 호수 5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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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33>

연구소란 것은 악기점 이층 넓은 방 두 간을 얻어 장만해 놓은 것이었다. 악기점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층으로 오르는 층대가 제물에 벽에 붙어 있다.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그 층계를 올라가 음악실이라는 데를 들어갔을 때 조촐한 방안의 분위기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검소한 속에 피아노 한 대와 축음기가 있고 의자들이 놓이고 벽에 몇 장의 그림이 붙어 있을 뿐이나 그 침착한 장식 속에 알 수 없는 매력이 숨어 있었다. 마음이 달뜨면서 주인이 보이지 않는 잠시 동안을 못 참아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서는 벽의 그림을 보면서 서성거리는 미란이었다. 천칠백사십칠년 프리드리히 대왕 때 궁정에 들어가 대왕 앞에서 피아노를 탄주하던 바하의 사진 앞에서 한참이나 서서 부질없는 흥분에 잠겼다. 늠름한 왕은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굽힌 채 대청을 거닌다. 그 등 뒤에 뭇 신하들이 궁싯거리고 서 있는 엄숙한 자리에서 풍채가 위대한 바하는 왕을 바라보면서 즉흥의 곡조를 울리는 것이다. 삼엄한 광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공상 속에 자기의 몸까지를 잠그면서 있노라니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주인이 나타난 것도 잠시는 몰랐다.
“내가 영훈이외다.”
목소리에 돌아선 미란은 앞에 선 주인 영훈의 자태에 놀라면서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꿈인가, 현실인가, 바로 이 사람이었던가――벙어리같이 입이 붙어서 멍하니 있을 때,
“동경서 만난 양반들이군요.”
저쪽에서도 놀란 듯 그러나 태연하게 먼저 기억을 일깨워 준다.
“세상에 우연한 일두 있지.”
너그러운 웃음을 띠면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는 젊은 음악가의 태도는 동경 악기점에서 피아노 때문에 시비를 하던 때와는 판이하였다. 패기에 타면서 예술가의 기상을 주장하고 고집하던 때의 기색은 간 곳 없고 오늘은 부드럽고 연한 평인의 기상이다.
“한 고장 한 동리에 살면서두 그 줄 모르구 그때엔…….”
온화한 말소리에 미란도 엉겼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그렇게 되고 보니 도리어 오랫동안의 구면인 듯 농담의 한마디도 건네게 되었다.
“나귀에겐 역시 거문고가 당치않은 것 같아요. 아무리 혼자 꿍꿍거려두 마음대로 돼야 말이죠.”
농임을 영훈도 알고 껄껄껄 웃으면서 이번에는 자기의 차례인 듯 피아노를 가리켰다.
“덕에 겨우 저런 것이 차례져 이 역 죽어라 하구 말을 들어야죠.”
현마가 웃음 속에 참가해 오면서 결론을 말하게 되었다.
“서로 주인을 바꿔 만났나 보군요. 나귀에겐 나귀의 것, 준마에겐 준마의 것이 가야 할 것을.”
미란은 짜증을 낼 것도 없이 웃음 속에 화하면서,
“누구 편에서든지 산 것만은 잘했군요. 불편할 때가 있거든 얼마든지 집에 와서 쓰세요.”
“쓸 뿐인가 나귀를 교육해 주셔야지. 실상 오늘 온 것은 그 때문인데 가르쳐 보아서 유망하거든 잘 지도해 주셨으면.”
현마의 말로 그들의 목적을 알고 영훈은 얼떨떨해졌다.
“간밤의 라디오의 쇼팽을 듣구 오늘 벼락같이 수소문해서 찾아온 것예요.”
“고맙습니다만 책임을 맡아 보면 일상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군 해서……”
사양하는 속에서 은연중 약속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미란은 생각할수록에 그날의 인연이 이상스러웠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디서 어떻게 맺어지는 것인지 원수같이 으르던 영훈이 열흘을 채 못 넘어서 자기의 스승이 될 줄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이 된 이제 그의 재주는 더욱 귀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생각이 한층 솟아오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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