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고요한’ 사진 미학
사색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고요한’ 사진 미학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5.08 10:59
  • 호수 5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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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한정식-고요’ 전
▲ 한정식은 한국 고유의 미와 철학을 담은 사진을 통해 한국 추상사진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1985년 작 ‘경기도 안성’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20년간 후학 양성… 한국적 형식주의 기틀 마련
평범한 사물에서 낯선 모습 찾아내… 나무‧발‧풍경‧고요 시리즈 등 선봬

사진과 영상의 차이는 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은 동영상만큼이나 생생한 소리를 상상하게 해준다. 관광지에서 활짝 웃으며 찍은 평범한 사진이라도 그 속에 담긴 풍경이 내뿜는 소리가 느껴진다. 포탄으로 폐허가 된 현장을 담은 종군기자의 사진에서는 굉음의 공포가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4월 2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난 한정식(80)의 사진은 달랐다. 작품명 그대로 ‘고요’했다. 적막한 미술관에서 만난 고요한 풍경은 관람객을 깊은 사색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국 추상사진의 선구자 한정식의 첫 대규모 회고전인 ‘한정식-고요’ 전이 경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8월 21일까지 진행된다.
한정식은 서울대 사대 국어과를 졸업한 후 강남중학교, 보성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1968년 1세대 다큐 사진작가 홍순태가 조직한 사진동아리 ‘백영회’에 참여하면서 사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동아사진콘테스트’를 비롯한 사진 공모전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가던 한정식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예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78년부터는 중앙대 및 신구전문대의 사진과 강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 1982년부터 2002년까지 20년간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한국사진계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 위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풍토에서도 한정식은 일찌감치 사진 자체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여 사진에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담아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적 형식주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 세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눴다. 전반부에서는 1980년대 들어 추상사진을 실험하던 ‘나무’ ‘발’ ‘풍경’ 시리즈를 소개하고 후반부는 그의 대표작으로 60대 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고요’ 시리즈를 선보인다.
전반부는 나무와 돌, 주변의 풍경에서 느껴지는 작가와의 교감을 담았다. 그는 자신의 앵글을 통해서 사물의 본래 형태에서 벗어난 새로운 풍경을 읽어낸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의 결에서 찾아낸 예수 얼굴과 목이 긴 여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또 그가 포착한 발의 모습은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표정으로 읽히기도 한다.
대표작 고요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진의 특성을 극복해낸다. 사물의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대상에 접근해 기존 사물이 가진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에 따라 작품 속의 사물들은 관객들에게 고유의 형태가 아닌 한정식이 정제해 낸 ‘고요’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특히 고요 시리즈 중 하나인 ‘영암 월출산 도갑사’가 그의 사진 미학을 잘 드러낸다. ‘추상사진’ 혹은 ‘사진적 추상’으로 불리는 그의 사진 미학은 형태를 벗어난 미를 추구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빈 방에 네모난 빈 탁자 뿐이다. 한정식은 “사진에서 추상을 만들어야 사물의 제1의 의미를 벗어나는 것이다. 도갑사 방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떨림이 일었다. 방 사진을 찍었는데, 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2012년 작 ‘강원도 홍천’.

사진 속 방은 수행자가 이 탁자에서 혼자 공부를 했거나 혹은 둘이서 차를 나누며 대화를 했을 법하지만, 작가가 포착한 순간은 비어 있다. 빈 방의 그 탁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적막한 공간에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작가는 과거, 미래, 현재가 통합된 시간이 펼쳐진 이 텅 빈 공간과 마주치며 내면의 평정과 고요를 표현했다.
경기, 강원, 전남 등 전국 곳곳을 돌면서 담아낸 고요 시리즈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이중 강원도 홍천의 계곡을 포착한 작품이 인상적이다. 가파른 계곡을 따라 흐르던 물결을 포착한 이 사진은 격하게 움직이는 듯하지만 조용히 멈춰선 순간을 담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결국 멀리 사라져 가는 물결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묻는다.
이와 함께 전시 마지막 공간에서는 사진 전공자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히는 ‘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저서와 이번 전시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북촌’ 시리즈가 담긴 도록 등이 비치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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