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에 생각하는 부모님
어버이날에 생각하는 부모님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7.05.12 13:08
  • 호수 5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하게 재생이 됩니다. 어느 날 오전, 조용한 방안에서 원고를 쓰던 중 문득 헛기침을 했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귀에 들린 기침소리는 바로 예전에 늘 듣던 그리운 아버지의 기침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아버지는 먼 길을 일부러 떠나지 않으시고 이 아들의 삶속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 엄마 잃은 아들이 얼마나 측은하고 가련했으면 이날까지 그대로 아들의 몸속에 머물러 계셨던 것일까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참으로 절박했던 그 시절로 훌쩍 돌아가 봅니다.
일제 말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양육하기에 너무도 힘이 부쳤던 것 같습니다. 일본으로 징용과 다를 바 없는 노무자 모집에 지원해서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가신 곳은 일본의 어느 발전소 건설 현장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기운은 무르익어가고 마침내 6·25가 터져서 1950년, 파괴와 살상의 광풍이 삼천리강토를 휩쓸어갔습니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불과 8개월의 태아였지요.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걸음조차 걷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를 보살피며 피난길을 떠났는데, 마을에서 약 8km 가량 떨어진 문중의 종산을 관리하는 산지기집이 목표였습니다. 산지기네 외딴집에 겨우겨우 당도해서 어머니는 바로 몸을 푸셨습니다. 몇 달 뒤 북한군의 퇴각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고향집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해서 간신히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고달픈 피난생활에서 얻은 어머니의 병은 호전되지 않고 점점 나빠졌지요. 1951년, 음력으로 5월 14일, 양력으로는 6월 18일 월요일.
나를 낳으신지 10개월 만에 어머니는 기어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향년 42세! 꽃다운 나이는 지났지만 한창 활기차게 살아갈 나이에 이게 무슨 변고와 횡액이란 말입니까? 제대로 즐거운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제국주의의 압박과 시련으로 극도의 가난과 고통을 겪다가 기어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렇게 숨을 거두다니요. 게다가 전쟁 통에 낳은 젖먹이 막내는 어찌하라고?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어린 막내생각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젖도 못 먹이고, 배고파 칭얼대는 어린 것을 두고 차마 저승길을 떠나지 못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어린 핏덩이가 눈에 밟혀 그저 막내 곁을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맴돌며 이리 보듬고 저리 쓰다듬으며 그대로 남아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마을을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1953년 봄, 아버지는 어미 잃은 4남매를 데리고 도시로 나왔습니다. 아무런 삶의 방책이 있을 리 없는 고달픈 이농민(離農民) 가족의 초라한 행색이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아버지가 틀어놓은 진공관 라디오에서 가수들의 노래가 들려올 때면 나는 그것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곤 했습니다. 특히 여성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저러할 것이란 생각마저 했던 것 같습니다.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난영, 장세정, 금사향 등의 노래가 들려오면 내 가슴은 마구 달아올라 황급히 공책을 들고 와서 가사를 옮겨 적었습니다. 한창 총기가 있을 때 쓰면서 바로 외웠습니다.
그렇게 3절 가사까지 익힌 옛 가요의 레퍼토리가 중학교 2학년 때 무려 470곡 가량이나 되었으니 참 기이한 소년이었겠지요. 대학노트로 빽빽이 적은 가사가 두 권이나 되었습니다. 모두 어머니 때문에 생겨난 집착입니다. 나에게 늘 부족한 어머니를 허겁지겁 채우느라 형성된 버릇이지요. 그런데 그 버릇이 지금 실버세대를 위한 각종 행사와 봉사활동에서 그분들께 즐거움을 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으니 이것도 참 기이한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온갖 곡절 속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오시다가 아흔 가까워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병상의 아버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축 늘어진 당신의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마지막 위로와 격려를 전해드렸습니다. “이 손으로 평생 가족들을 먹이고 보살피시느라 노고 많으셨어요. 특히 일찍 엄마 잃은 저를 위해 품에 꼭 껴안으시고, 암죽도 끓여주셨지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제 속에 계실 것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진작 내 안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부모님을 원망하고 고독과 허전함을 탄식하던 못난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깨닫지 못하는 그 꼴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했던지 모릅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일이 많지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저를 낳아주시고, 돌아가신 뒤에도 항상 제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이날까지 살뜰히 보살펴주셨으니 고맙습니다. 정유년 어버이날에 이 막내가 올리는 눈물의 절을 받으셔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