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경전
푸른 경전
  • 글=이기영 시인
  • 승인 2017.05.12 13:09
  • 호수 5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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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경전

백로들이 빈 논을 읽는 중이다
다 읽으려면 한 계절 족히 걸리겠다

최광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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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이 파릇파릇한 논에 백로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움벼는 여벌의 삶이라도 최선을 다해 푸른 싹을 키우고 있다. 다시 꽃을 피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시 싹을 밀어올린 그 순간만큼은 새파란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항변하는 저 뜨거운 싱그러움. 벼를 심기 위해 갈아 엎어버리기 전의 논이 혼신의 힘을 다해 온통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그 사이를 경전을 읽어 내려가듯 백로들이 풍경을 완성한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신의 말씀을 적어놓은 것이 경전이 아니던가. 백로들이 먼저 읽고 있는 저 푸른 경전을 자연이 키우고 인간은 거둬들인다. 그 사이에서 백로들은 다음 계절을 예약하고 또 다음 계절을 불러온다.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어찌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 주장하겠는가. 나누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세상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순리인데.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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