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이쪽을 노리는 옥녀를 보고 단주는 주춤 머물러 섰다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이쪽을 노리는 옥녀를 보고 단주는 주춤 머물러 섰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5.26 13:27
  • 호수 57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37>

현마는 물론 단주도 그날 참석은 했으나 우울한 상을 지니고 혼자 생각으로 가슴속이 그득 차면서 물 위에 뜬 기름같이 좌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유쾌하게 웃고 이야기하고 하는 한자리의 좌석이라는 것이 떨어져 볼 때에는 정해 놓고 즐거운 것이나 실상 따져 보면 그 속에는 허다한 모순과 갈등을 내포한 것임을 그날의 좌석같이 증명해 보이는 자리는 드물었다. 식탁에 늘어들 앉아 술잔을 돌리고 이야기를 건네고 할 때 단주는 최후의 만찬 때의 유다와도 같이 유독 즐기지 않으며 마음이 갈라져 달아났다. 차례로 돌아오는 술잔을 찡그린 표정으로 거절하는 짓부터가 유다의 행세였다. 그러면서도 미란의 표정에는 바늘 끝같이 치밀한 주의가 가고 그의 눈치가 두려웠다.
“한자리에선 다 같이 즐겁게 하는 것이 신사된 예의가 아니예요? 누구에게 허물이나 있듯 찌뿌득해 하면 그 성미를 누구더리 받으란 말요.”
기어코 미란의 한마디가 터져 나왔을 때 단주는 무안해서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로 말미암아 이지러지는 자리의 공기를 살피게 되었다. 별수 없이 한 자리의 속박이었다. 마음과 몸을 한 줄에 묶이우고 예의를 지키고 자리의 비위를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속박이었다. 그것도 미란을 위한 것이라면 참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으나 식사가 끝난 다음 대청으로 들어가서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는 견딜 수 없었고 마음의 구속을 무한히 참지 않으면 안 될 법은 없을 듯했다. 영훈에게도 사실 자기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요 주의의 초점이어야 할 법한데 그는 도시 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고 자기를 위해서는 신경의 한 가닥도 안 쓰는 듯이 보이는 것이 무시나 당한 듯해서 더욱 자리가 싫어졌다. 영훈과 미란과의 유치한 듀엣의 연주를 간신히 참으면서 들은 그로서 다음 영훈의 독주까지를 들어야 할 의무는 없을 듯했다. 베토벤의 소나타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 자리를 일어나 뜰로 나왔다. 통일을 어지럽힌 셈이었다. 전체에 대한 반역이었다.
《월광곡》이었다. 제일악장 아다지오의 느릿한 환상이 개시되었다. 아다지오에서 알레그레토를 거쳐 프레스토로 악장을 따라 급속하게 변해 가는 그 곡조는 대체 어떤 감정의 고패를 나타내자는 것이었을까. 줄리엣에 대한 베토벤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타냈다고 일컬어지는 그 곡조를 왜 하필 영훈은 선택한 것이며 미상불 그의 기술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침통하고 옅은 화음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랑의 환상을 표시하는 듯――시냇물 빛나는 달밤에 들으면 한층 효과 있을 그 곡조가 저문 뜰 안에서 들어도 충분히 아름답다. 창으로 새어 나오는 음률이 나뭇잎 사이를 흘러 뜰 안에 퍼졌다. 전날까지도 봄이 주춤주춤 망설이던 뜰 안은 어느덧 봄이 활짝 지나 구석구석 짙은 여름빛이었다. 초목이 검푸르게 우거지고 꽃도 시절을 갈아 화단의 여름 화초가 피기 시작했다. 나뭇잎은 퍼질 대로 퍼져 군데군데에 밀접한 세계를 이루고 가족을 꾸미고 으늑한 그림자와 구석과 비밀을 마련하고 있다. 월광곡의 선율은 그 구석구석으로 새어 들고 잦아들어서 사람의 정서를 초목 속에 퍼붓는 듯하다. 제일악장의 음산한 데 비기면 경쾌한 제이악장은 ‘두 깊은 골짝 사이에 핀 꽃’인 듯 곱고 즐겁고 유쾌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슴이 뛰놀고 기쁘다는 것일까. 삼악장의 격정적인 하소연으로 옮아갈 때까지 한동안 그 유쾌한 선율이 울려왔다. 모르는 결에 음악 속에 폭 잠기다가도 문득 자아로 돌아오는 단주였다. 무심한 음악 속에서까지 신경은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유쾌한 음악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리를 뺏은 영훈의 것임을 깨달을 때 얼굴의 표정은 이지러지며 질투와 증오로 변해 갔다. 유쾌한 곡조가 마음속에 파도를 일으킨 것이다. 그 무서운 표정을 만약 가만히 살펴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음악의 효과를 얼마나 무서운 것으로 여겼을까. 공교롭게도 그 찌그러진 낯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옥녀였다. 지름길을 걸어 능금나무 있는 편으로 갈 때 풀숲 꽃포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이쪽을 노리는 옥녀를 보고 단주는 주춤 머물러 섰다. 가소로운 꼴을 들켰을 때의 얼삥삥한 자세로 옥녀를 노리려니 옥녀는 성큼 일어서면서 웃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