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둘러싼 논쟁들 <7>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나
한국사를 둘러싼 논쟁들 <7>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나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7.06.02 14:11
  • 호수 5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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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때 ‘북침설’ 파장… 객관적 자료 ‘남침’ 입증
▲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한국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북침설, 미 커밍스 교수가 제기… 소련비밀문서 공개되자 입장 뒤집어
전 소련 서기장 흐루시초프, 인민군 작전국장등 “남침이었다” 고백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은 2014년 ‘6‧25전쟁 1129일’을 발간한 후 전국 모든 경로당에 100만부를 기증해 한국전쟁이 명백한 남침(북한이 남한을 침략)이었음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중 상당수가 북침(남한이 북한을 침략)으로 오인하고 있다. 2015년 한 취업포탈 사이트에서 성인남녀 12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절반에 육박하는 45.7%가 북침이라고 답해 큰 충격을 줬다. 한자어를 몰라서 발생한 문제였지만 북침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은연중에 대중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6·25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다. 전후 사정만 살펴봐도 잘 드러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해 전쟁이 벌어졌다. 중국의 마오쩌둥과 소비에트연방(소련)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이날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남한으로 진격했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했지만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됐다.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의 학살이 자행되고 처벌과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파렴치한 일을 자행하고도 북한은 전쟁 첫날부터 대외선전기관을 통해 이승만 정부가 먼저 침략했다고 주장했다. 일명 북침설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해외 수정주의 학파들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미국 시카고 대학의 진보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자신이 쓴 ‘한국전쟁의 기원’(1981)에서 이를 주장했다. 이 책이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문제가 됐다.
커밍스 교수는 옹진반도 등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분쟁이 내전으로 발전해 6·25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6월 25일 당일, 옹진반도에서 남한이 선제공격해 전쟁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내세웠다.
이런 주장은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허위로 밝혀졌다. 1993년 1월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는 기록을 담은 소련의 비밀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이 비밀문서들을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본으로 전달했다. 이후 커밍스 교수는 2013년 6월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한국전쟁은 북에 의한 남침”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북침설이 허구라는 근거는 많다. 만일 남쪽에서 먼저 선제공격했다면, 개전 첫 날 초토화된 곳은 38선 북쪽의 북한군 진지여야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날 피 흘리고 죽은 사람은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이었다. 남쪽 병원은 전·사상자들로 가득 찼고 허겁지겁 보따리를 짊어지고 피난 간 사람들은 모두 38선 이남 사람들이었다.
북침을 위해선 탱크 등으로 중무장하는 등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만 우리 국군은 탱크도 없고 전투기도 없었다. 반면 북한군은 탱크 242문,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를 비롯한 211대의 항공기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옹진에 있던 17연대가 해주를 선제공격했다고 주장하지만 옹진에서는 6월 24일 ‘군민 친선의 밤’ 행사가 열려 오후 10시까지 17연대 장병들과 군민들이 화합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북침이라면 소련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하고 한국을 규탄해야 하지만 오히려 유엔은 북한을 비판하고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에 대한 객관적 자료도 많다. 소련의 서기장을 지낸 흐루시초프도 1972년 발행한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승낙을 받아 ‘침공’한 남침전쟁”이라고 고백했다.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 역시 남침계획은 1950년 5월 29일 소련의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가 러시아어로 작성하고, 자기가 한글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유고슬라비아에서 간행된 1978년도 대백과사전에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발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1950년 북한은 남한에 대해 ‘침략’을 감행했다”고 기록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6‧25전쟁 1129일’에도 남침 사실이 낱낱이 기록돼 북침설은 허구성이 확실히 드러났다.
이처럼 ‘남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남침유도설’도 들고 나왔다.
남침유도설은 우리 한국이 북한을 자극해 남침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즉, 남한의 선제공격에 북한이 대응하면서 우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됐다는 ‘가설’로서 1973년도 인도학자 카루나카 굽타가 가장 먼저 주장했다. 카루나카 굽타는 그 근거로 ‘해주 점령설’을 내세웠다. 당시 옹진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7연대가 황해도 해주를 먼저 공격했으며, 북한은 방어 차원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는 가설이다. 이 역시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6월 25일 17연대는 이미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궤멸 상태에 빠졌으며 공격은커녕 전·사상자(750명)를 처리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결국 병력의 절반을 잃고 26일 인천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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