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음미하는 디카시 산책
꽃의 주소
식구들 발길에 채일 때는 끄떡없더니
일가족 떠나고 나니 오히려 문턱이 허물어지네
나부끼던 공과금 고지서도 끊긴 지 오래
담장에 번지수는 하릴없이 선명하다 하였더니
봄마다 벌 나비 배달부 찾아오는 꽃의 주소였네
반칠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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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지고 있는 대문 문턱이 빈집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한동안 오던 공과금 고지서도 끊긴 지 오래이면 사람이 떠나버린 지도 꽤 오래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집,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집. 식구들의 도란거리는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온기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뜨거운 온도이며, 몇 백 년이고 견뎌내는 집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버리면 집은 더 이상 견딜 희망을 잃어버리고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하지만 아직 담장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37-4번지라는 이 주소는 해마다 잊지 말고 찾아오라는 벌, 나비 배달부에게 보내는 꽃의 주소다. 사람은 떠났어도 문밖까지 나와 온 몸으로 저 환한 꽃. 아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이토록 환한 기별을 보내는 거라고, 벌 나비 찾아와 소식 전해 달라고.
글=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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