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 ‘빼앗긴 들’의 장소성 문제
이상화 시 ‘빼앗긴 들’의 장소성 문제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7.06.16 10:47
  • 호수 5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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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바르지 않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앞세워 이익을 도모하고, 그 상태로 아무런 반성이 없이 오랜 세월을 경과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진실인 듯 그 나름대로의 권위마저 얻게 된다.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진보하고 정의롭게 바뀌며 발전한다는 것은 각종 비리를 과감하게 몰아내고 신속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은 항시 중요한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대구출신 이상화(1901~1943) 시인이 남긴 전체 시작품은 도합 60여 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문학사에서 이상화의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영원불멸이요, 고전이다. 그 까닭은 그의 초기 시세계가 1920년대 시창작 풍토의 일반적 흐름이었던 몽상적, 퇴폐적 성향에 휩쓸려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했으나 이후 치열한 내면적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겪으며 마침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빛나는 시 정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분단된 국토에서 모든 것이 둘로 갈라지던 험악한 시기에서도 이상화의 시작품은 김소월(1902~1934)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놀라운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문학사를 통틀어 이런 문학인은 극소수이다.
시인의 고향인 대구광역시에서는 지난 2005년부터 수성구청이 주관하는 상화문학제가 시작돼 올해로 열두 해째를 맞고 있다. 수성구의 수성문화원이 이 행사를 주관해온 까닭은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을 수성구 들안길 일대(옛 수성 들판)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화문학제에서는 시인의 이름을 걸고 세미나, 백일장, 문학의 밤, 유적답사, 시낭송대회 등 여러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검토해야할 매우 중대한 문제가 하나 새롭게 제기됐다. 그것은 이상화 시인의 절창 ‘빼앗긴 들’이 만들어진 공간배경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 장소는 수성못 일대가 아니라 대구 남구 대명동 일대의 앞산 밑 보리밭이었다는 놀라운 증언이 새로 발굴됐기 때문이다. 시인의 아우였던 이상백(1904~1966) 박사가 발표한 칼럼 ‘꿈같이 희미한 기억’(동아일보, 1962.3.11)이란 글에서 사중(舍仲)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라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수성구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수성들판설이 완전한 왜곡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형보다 세 살 아래인 이상백 박사는 형을 포함해 대구지역 비슷한 또래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 ‘거화’(炬火)라는 이름의 시동인지를 발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문학에 돈독한 뜻을 지녔던 문학청년이었다. 형제간의 우애는 마치 다정한 친구와도 같았으며, 형의 창작세계와 여러 배경에 대해 아우는 항시 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터이다.
수성구청의 판단은 아무런 구체적 사료나 물증이 없이 다만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민족문화의 보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확실한 창작배경이 밝혀졌으니 당시 보리밭이 있었던 장소, 대구 남구 앞산 밑 적절한 곳에 정식으로 그 사연과 배경을 적은 시비(詩碑)를 건립해야 마땅하다.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 밑에 위치한 미군비행장은 1920년 일제가 경비행장 활주로를 닦고 전쟁에 대비하여 탄약고 따위를 설치해 운영하던 곳이다. 8.15 광복이 되자 미군이 이를 접수하여 그들의 경비행장으로 손쉽게 사용했다. 이것은 마치 해방 이후 서울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자리에 육군본부가 들어선 것과 구도가 흡사하다.
이상화 시인이 1926년 무렵 이 일대 보리밭을 자주 산책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군사기지로 전락되어가는 고향의 파괴와 훼손, 유린현장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을 터이고, 그 과정에서 시인은 깨달은 지식인으로서의 아프고 따가운 내면적 고뇌와 직면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다. 이 추론은 매우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상상과 자료에 근거해 의미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수성구에서는 비록 왜곡된 심증만으로 상화문학제를 시작해서 여러 해째 운영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상화의 문학정신과 그 유산은 전체 대구시민과 한국인의 공동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화축제가 수성구의 전유물로 운영되고 독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과 모티브가 명쾌하게 밝혀졌으므로 전체 대구시민과 관계기관 모두가 합심 단결해 이상화의 문학정신을 되새기고 현양하는 일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춰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실천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라 하겠다.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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