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요구한다, 사랑에 처음으로 눈 뜬 듯…
세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요구한다, 사랑에 처음으로 눈 뜬 듯…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6.16 10:57
  • 호수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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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0>

단주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걸음걸이에는 지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요, 그만 것으로 병석에 눕는다는 것이 도시 야단스러운 짓이었으나 단주의 감정은 확실히 과장된 것이었고 트집을 부리는 아이의 행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탁자 위에는 탈지면과 가제와 알코올과 물약 병이 있고, 방안에는 소독 냄새가 풍겨져 있는 속에서 자리옷 아래로 깨끗한 붕대를 하아얗게 드러내 놓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꼴은 흡사 큰 병이나 치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단주는 그 야단스런 거동을 은근히 즐겨 하고 그 속에서 슬픔을 꾸미고 과장해서 일부러 가련한 신세 속에 몸이 잠긴 듯 마음을 치장하는 것이었다. 멀쩡하던 몸이 왜 이렇게 별안간 앓게 되었누, 누구 때문에 병이 생겼누――하고 그 병의 원인이 그 누구의 허물인 듯 어린 양을 상한 것은 사나운 이리라는 듯 슬픈 동화 속에 몸을 두고 정체 없는 사나운 이리를 저주하고 어린양을 동정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추스르는 단주였다.

화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으나 그것은 위문객이 가져온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아파트의 하녀에게 분부해서 사다 꽂은 것이었다. 그런 것이언만 그 한 떨기는 마치 위문객이 갖다 준 것인 듯 환상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울고 웃고 했다. 방안에는 단순하지 않은 그의 생활의 역사가 차례차례로 흐른 것이었으니 곰곰이 생각하면 그 역사의 한 장 한 장이 모두 슬픈 것이었던 듯 즐거운 것은 조금도 없었던 듯 생각되면서도 그 슬픈 역사가 추억의 기쁨을 가지고 마음을 오물하게 했다. 가령 침대를 바라보면 침대의 역사가 차례차례로 떠오르면서 마음을 흐붓이 잠겼다. 역사가 만약 때요 이끼라면 장구한 시간의 덕지덕지의 때가 침대 기둥에 붙었을 것이 사실이요, 그때 속에는 현마와의 불쾌한 때도 있을 것이요, 미란과의 안타까운 때도 섞였을 것이다. 폭풍우날 밤 미란과 침대위에서 떨면서 전원교향악을 들었을 때의 사적이 확실히 방 그 어느 한 구석에 남아 있을 듯 그것을 찾아내고 맡아 내기에 단주의 노력은 집중되었다. 침대 위에 누우면 모두 그날 밤의 것인 베개와 홑이불이 안타까운 생각을 실어 오면서 눈물을 자아낸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서 한동안 푹 자아낸 다음에야 마음과 몸이 거뿐해진다. 베개를 질펀히 적신 눈물을 자기 혼자만이 보기에는 아까운 듯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듯 눈물이 만약 물감이어서 베개를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라면 그 베개를 그대로 간직했다가 얼마나 눈물이 많은 것인가를 미란에게 보이고 싶은 그런 감정이 솟았다. 눈물을 흘린 다음 몸이 거뿐해지면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트럼프로 그날 운수를 점쳐 본다. 스페이드의 검은 빛이 대기(大忌)요, 하트나 다이아의 붉은 기호에 마음을 뛰놀리면서 거듭 피라미드 모양의 나열을 쌓았다간 헐고 쌓았다간 헐고 한다. 옳게 떨어지는 날은 즐거운 기대에 마음이 가벼웠고 종시 말을 잃기고 막히는 날에는 마음이 무겁게 드리우고 흐려졌다.

위문객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현마가 오고 세란이 오고 미란도 왔다. 문제는 그 배합이어서 현마는 혼자 올 때도 있으나 대개 세란이나 그렇지 않으면 미란과 짝이 되었고 세란은 현마나 미란과 동무했고 미란의 편으로 본다면 현마나 세란과 같이 온 셈이었다. 물론 세란이 혼자 꽃묶음을 사들고 온 때도 있었으니 단주에게는 그런 때가 난처하고 두려웠다. 세란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았다. 현마와의 부부생활은 사랑의 생활이 아니었고 단주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랑을 안 듯한 그런 무더운 열정으로 단주를 조른다. 사람이 극도로 욕심스러울 때는 물이나 불을 헤아리지 않는 아이와 같이 날뛰는 것인 듯하다. 세란이 단주와 대할 때에는 피차의 지위가 거꾸로 바뀌어 세란이 아이가 되고 단주가 어른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가 지각없이 욕심을 부리면 어른은 그것을 누르고 조절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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