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 얼굴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우고 비극의 주인공을 방불시켰던 것이다
단주 얼굴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우고 비극의 주인공을 방불시켰던 것이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6.23 13:33
  • 호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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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1>

창기병이 들기 시작한 세란의 투정을 단주는 벌써 당하는 재주 없었고 이상한 것은 세란이 욕심을 피우면 피울수록 단주는 그의 열정이 달갑지 않아지고 귀찮아 갈 뿐이었다. 당초의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른 제비를 뽑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불만한 생각만 늘어갔다. 어떤 때에는 두려워지면서 웬만한 곳에서 그와의 사이를 청산해야 할 것을 느끼나 그런 티를 조금이라도 표면에 내면 세란은 더욱 물인지 불인지를 모르고 분별을 잃어버렸다.
“누가 그 눈치 모를까봐. 사람이 앞이 닦여지면 욕심이 나는 법이라구. 룸펜 노릇을 하면서 찻집에서 뒹굴던 올챙이 적 생각을 좀 해보지. 이래저래 처지가 흡족해지니까 눈앞을 깔보고 아닌 욕심만 내면서……”
이런 말을 들을 때 반성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으나 반성하면 할수록에 현마에게 대한 민망한 생각이 들며 세란과의 사이를 청산해야 하겠다는 결의는 더욱 굳어졌다. 세란은 참으로 무거운 짐이요 비싼 대상이다. 그와 마주치면 모처럼 꾸며 두었던 슬픈 마음과 표정도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정염의 노예가 되어서 질질 끌리는 동안에 피곤해질 뿐이다. 창백하게 피곤한 속에서 미란에게 대한 생각이 외줄기 철사같이 가늘고 곧게 솟아오른다. 회오리바람같이 세란이 지나가 버린 후 빈방에서 홀로 다시 병든 사람의 감상을 회복하고 슬픈 표정을 시작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으나 미란을 생각함은 그런 처지에서만 적절했고 그런 심정 속에서는 미란밖에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세란과 미란은 품격이 다르다. 한 사람이 휘저어 놓는다면 한 사람은 가라앉혔다. 어쩌다가 미란이 혼자서 찾아와 주는 때면은 방 안은 고요하고 침대에 누운 단주의 모양은 한껏 슬프게 보여서 단주가 생각하는 효과가 제물에 충분히 발휘되었다. 의지가지없는 외로운 사람이 여기에 병들어 누었도다――그런 인상을 주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미란이 단독 두 번째 찾아오던 날 저녁 그런 효과는 예측 이상으로 발휘되었던 것을 단주는 안다. 자신 그런 효과를 꾸며 놓고는 동시에 다른 편에 서서 그것을 계산하고 측량하는 국외자――말하자면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한 사람의 배우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그 한 간의 방 안은 비극의 제삼막째 무대 면이고 단주 자신은 홀로 등장하는 비극배우인 것이다. 새로 감은 하아얀 붕대며 잠옷이며 부러 코 아래 길러논 수염이며는 배우로서의 분장인 셈이고 새로 갈아 논 깨끗한 침대보며 어항 속에 죽어버린 금붕어며는 일종의 무대장치인 셈이다. 화병에 꽂힌 아지랑이꽃과 호국 등속의 애잔하고 푸른 빛도 무대의 효과를 더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봄부터 차례로 진달래, 개나리, 장미, 스위트피, 튤립, 제라늄을 거쳐 화병도 어느덧 여름을 맞이하여 호국과 도라지꽃의 푸른 꽃을 가진 셈이나 붉은 꽃이나 누른 꽃과 달라 푸른 꽃같이 슬픈 것은 없다. 푸른 것이라면 화병의 푸른 꽃뿐이 아니라 방 전체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여 주는 푸른 벽지며 침대보의 푸른 가장자리며 책상 위에 널려져 있는 푸른 표지의 책들이 모두 방안의 빛깔을 한 가지 방향으로 통일하면서 비극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위에 특별히 그날 저녁의 효과로서 방안이 유심히 푸르둥절하게 어두웠던 것은 대체로 창밖 공기의 탓이기도 했다. 온 누리가 푸르스름하게 저물어 가는 저녁때라는 것이었다. 바닷속 세상을 그대로 들어다 놓으면 그런 것일 듯 짐작되는 주위가 안개나 연기가 낀 듯 푸르고 자옥해지면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꿈속 사람들 같이 보이는 그런 때가 있다. 그날이 마침 그런 저녁이어서 열린 창으로 푸른 세상이 내다보이며, 푸른 공기는 바닷물같이 창으로 흘러들어서는 방안을 전체로 밖 세상과 같이 푸르둥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푸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인 단주 자신도 푸른빛에 물들어 얼굴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우고 회춘회춘한 전신이 비극의 주인공을 방불시켰던 것이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깍지 낀 두 손 위에 뒷머리를 얹고 번듯이 누워 있는 꼴은 맞은편에 걸린 염소의 탈과도 같이 서글프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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