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냄새를 맡으면서 단주는 어둠 속에 미란의 하아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화장냄새를 맡으면서 단주는 어둠 속에 미란의 하아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7.07 11:27
  • 호수 5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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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3>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사람은 이치도 연유도 없이 무턱대고 머리를 숙이고 항복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의 절대적인 특권인 것이다. 미란은 그날 저녁 오래간만에 단주의 모양에 정신을 뽑히었다. 반성을 허락하지 않는 순간의 감정인지는 모르나 그 순간의 감정이 절대적인 것이었다.
“괜히 법석을 하구 엎어지구 다리를 다치구……. 영훈씨야 내가 선생으로 사모하는 것이지 그 이상――.”
“사람이 자기 맘을 다 안다구.”
“그야 여러 고패 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미란은 확실히 자기 변명을 하고 있음을 내심으로 느꼈다.
“웬일인지 자꾸만 무서워지구 서글퍼지구…….”
“앓구 누웠으면 그런 법이지. 그러게 얼른 일어나도록 하라니까.”
“전에는 바로 손닿는 곳에 있던 것이 어느 결엔지 멀어져서 하늘 위로 달아나 버리는 듯――.”
“파랑새인가 머.”
“그 파랑새. ――놓쳐 버린 파랑새. 까맣게 쳐다 보이는 파랑새.”
“바로 옆에다 두구두.”
가엾어지는 마음에 어떻게든지 해서 마음껏 위로해 주고 싶음을 느끼고 있을 때 이웃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왔다. 잠잠하고 어두운 방에 별안간 불이나 켜진 듯 한 줄기의 광명을 인도해 넣는 것이었다. 교향악이었다. 초목같이 우거져 나오는 굵고 복잡한 음률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듯 방 안의 모양이 음악 속에서 우뚝 떠올라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당돌한 그 침입자로 해서 우두커니들 앉아서 귀를 기울이다가 귀익은 멜로디를 듣고 미란은 반가운 동무나 만난 듯 마음이 훤해지며,
“전원교향악이구먼.”
동무의 이름이나 부르듯 기쁜 목소리였다. 단주에게도 그것은 반가운 동무다. 그도 마음속에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란의 목소리에 응답한다. 간간이 되풀이되는 귀여운 멜로디는 우거진 초목 속에 군데군데 피어 있는 꽃 같으면서 그 아름다운 꽃이 두 사람에게 먼 기억을 실어 왔다. 지나가 버린 봄의 기억. 같은 방에서 같은 곡조를 들으면서 인생의 공포에 떨던 밤의 기억이 두 사람을 차차 황홀 속으로 끌어넣어 갔다.
“폭풍우 날 밤――.”
요란한 화음의 폭포에 미란은 자리를 일어서면서,
“그날 밤을 생각하면 무서워져요.”
침대로 달려갔다. 단주는 자기 몸에 와 닿는 미란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며 전염이나 된 듯 자기의 몸도 덩달아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걷잡을 수 없었다.
“오늘 밤두 흡사 그날 밤 같으면서――”
향기로운 화장냄새를 맡으면서 단주는 바로 몇 치 앞 어둠 속에 미란의 하아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달보다도 아름답고 해보다도 휘황하다. 액(額) 속의 그림같이 그 부분만이 세상의 모든 물상과 구별되고 떨어져서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서 오려내 온 가장 아름답고 엄엄하고 높은 것으로 보이면서 마음을 흠뻑 흡수해 들인다. 그 가장 아름답고 숭엄한 것이 바로 몇 치 앞에 놓여 있음을 깨닫자 눈알이 현혹해지면서 손바닥에 땀이 빠지지 나고 목구멍이 울린다.
동정이라는 것이었다. 미란은 그날 밤 일을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단주로서 보면 일상 그가 꾸미고 늘이고 있던 감상의 그물 속에 그날 기묘하게 미란이 걸려온 셈이었으나 미란으로서 보면 단주의 자태가 감상의 경지를 넘어서 참으로 쓸쓸하고 가엾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방안의 공기라는 것이 푸르고 차게 가라앉아 있는 속에서 휘줄그레하게 병들어 있는 단주의 꼴이 운명해 가는 염소같이 꺼져 가는 음악소리같이 애잔하게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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