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벌이 있을 듯한 생각에… 뉘우침과 반성은 곧 단주에게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천벌이 있을 듯한 생각에… 뉘우침과 반성은 곧 단주에게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7.14 11:38
  • 호수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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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4>

애잔한 것이 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다. 멸망의 아름다움이 정신을 뺏으면서 그 모든 것이 자기의 탓으로 생각될 때 동정의 마음이 솟았다. 동정 속에서는 대상이 아름다워지면서 전에 못 본 새로운 방면을 발견해 낸 듯 그것이 지금에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음악보다도 천재보다도 더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불안과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몇 달 전 폭풍우의 밤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즉 그날 밤의 공포의 경험으로 해서 그만큼 감정이 익숙해지고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단주의 태연하고 침착한 것이 밉살머리스러우면서도 미란은 그에게서 그 침착성을 본받고 배우는 것이었다. 당초에 같이 길을 떠났음에도 지금 그 인생의 문을 들어서는데 두 사람이 노정에는 차이가 있어서 단주는 미란보다는 하루의 선배가 된 셈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가 미란을 따돌리고 인생의 스승이 된 것인가는 물론 아직 미란에게는 알 바 없었다. 단주보다도 미란의 감격이 더 컸던 것은 물론 이것이 벼르던 길이었구나, 대체 그것이 무엇일지를 모르면서도 안타깝게 떨면서 속히 그 문을 잡으려고 서두르고 계획하다가 결국 처음 번에는 실패했던 그 길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면서 이치를 체득한 후의 아이와 같이도 감개가 컸었다. 한꺼번에 세상을 알아버리고 복잡한 우주의 신비를 잡아버리고 아까까지의 세상을 하직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듯――복잡한 감동이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의 감개가 지나간 후에 오는 반성의 채찍은 모질고 매웠다. 아마도 모르는 두 사람만의 짧은 시간의――사건은 극히 간단한 것이나 깊이 생각하면 기막히게 중대한 일을 순식간에 저질로 놓은 뉘우침이 났다. 물을 길으러 갔다가 물동이를 반석 위에다 와싹 깨트려 버린 듯 꼬까옷을 입고 나섰다가 진흙 속에 빠져 망쳐 버린 듯――뜨끔한 생각이 들었다. 옷을 적시거나 동이를 깨트리면 기껏해야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으면 족한 것이나 자기가 저지른 인생의 실책을 꾸짖을 사람은 어머니쯤이 아니고 더 큰 것, 가령 조물주나 하늘이나 그런 무서운 것일 듯한 두려움이 솟았다. 저지른 이상 영원히 제대로 돌릴 수 없고 지울 수 없고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할 때에는 죄의 의식으로 변해갔다. 그 죄에는 벌이 있을 듯――자연의 계시를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임의의 시간에 계율을 어긴 데 대해서 천벌이 있을 듯도 한 생각이 났다. 이런 복잡한 뉘우침과 반성은 곧 단주에게 대한 염증으로 변했다. 아까까지의 애잔하고 아름답던 것과는 판이해져서 누추한 노예같이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병들고 약한 것은 병들고 약한 것일 뿐이요 아름다운 것도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방안의 비극적 분위기가 결국 자기를 속였음을 알았다. 신비와 공상은 날아가고 어둡고 침침한 방안은 환멸의 굴속으로 변하고 감상을 위조하고 도롱뇽의 안개를 뿜고 있는 비극배우 단주는 평범하고 산문적인 한 마리의 나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평범한 것이 자기의 바라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위가 거슬려졌다.
그 결과는 미란을 몰아다가 한갓 예술의 길로 향하게 했다. 정진에 대한 자각이 굳어지고 영훈에게 대한 존경이 극진해 갔다. 참으로 세상에서는 천재만이 귀하고 뜻있는 것이지 그 외의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요 어리석고 게으른 벌레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나귀밖에는 못 되는 단주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바친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애틋해지면서 그와의 사 이는 그것으로써 끝을 막아 버리고 그 이상 더 결혼이고 무엇이고 하는 일절 생각을 칼로 베인 듯이 끊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의 악몽의 환영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자나깨나 음악을 생각하고 피아노 앞에 앉으면 밤 깊어가는 줄을 잊었다. 영훈이 그의 재분(才分)을 발견하고 유망하다는 선언을 했을 때, 두 사람의 이해는 깊었고 그에게 대한 경의는 더욱 짙어가는 것이었다. 그를 놓치지 말고 힘껏 붙들고라야만 목적의 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지금에는 그만이 가깝고 친밀한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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