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를 앞둔 가야는 집안 사람의 성화를 피해 영훈의 연구소를 피난처로…
결혼기를 앞둔 가야는 집안 사람의 성화를 피해 영훈의 연구소를 피난처로…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7.21 11:40
  • 호수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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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5>

영훈이 학교를 사퇴(仕退)하고 나온 후 세 시부터 두어 시간 동안 연구소는 연구생들로 해서 한바탕 요란들 했다. 성악과 피아노의 초보의 연습생들이 차례로 수십 분씩의 시간을 잡으면서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음악학교를 지원하는 수험생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심심파적으로 음악을 시작하려는 패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가야가 가장 실력 있고 착실한 편이어서 그가 부르는 슈베르트의 서정곡은 제법 제식의 것이었다. 다른 패와는 달라 거의 날마다 연구소를 찾는 그는 다섯 시가 지나 연구생들이 돌아간 후 소 안이 고요할 때까지 그 안에 혼자 남는 것이었고 밤에도 그의 그림자는 자주 눈에 띠었다. 그 이층은 영훈에게는 살림터로 되어서 연구실 옆 조그만 방이 거처하는 방이었다. 그 살림방에서까지 가야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적이 있었다. 가야는 반드시 음악을 배우러만 그곳을 찾는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아직 영훈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결혼기를 앞둔 가야는 집안 사람의 성화를 피해서 그곳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었다. 약혼자는 고명한 럭비선수――여기에 비극의 근원이 있었다. 부모가 하필 체육가를 고른 것은 외딸의 약질임을 생각한 결과였으나 약질인 딸 편으로 보면 그런 우생학의 입장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었고 체육가같이 천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육체의 힘을 재주 삼는다는 것이 인간의 재주로서는 가장 핫질인 것이어서 체육 편중의 현대주의라는 것이 원시로 돌아가라는 고함소리같이 속되게 들리는 것이었다. 육체라는 것은 인간의 원시적 전제인 것이요, 체육을 힘쓰지 않는다고 문화를 감당해 나가지 못하리만큼 체력이 퇴화되고 인류가 멸망할 법은 없는 것이다. 육체는 동물의 자랑거리일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자랑거리는 못 된다. 수십 명을 때려눕히는 권투가의 영광이라는 것은 투우장에서 두 뿔로 사람의 창자를 받아넘기는 황소의 영광 이상의 것은 아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가야에게 체육의 선수 갑재는 처음부터 어그러진 배합이요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권투나 럭비나 갑을을 매길 것이 못 되는 것이었고 황소의 영광으로써 인간 일생의 영광을 짝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와의 충돌을 피해서 집을 나오는 날이 많았다. 이 얼마간 봉건적인 육체 멸시의 정신주의는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모르나 가야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어서 이것이 영훈과의 사이의 관계도 스스로 규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음악을 존경하고 재주를 찬양하는 마음이 어느덧 그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한 것이었으나 그 사모하는 마음이 바늘 끝 같이 점점 곧고 뾰족해졌다. 정신력이 유달리 강한 것일까,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밖으로 활짝 타 나가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뜨겁게 피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훈과 마주앉으면 한마디 하소연을 못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섭게 타오르는 불꽃을 느껴 갔다.

미란이 가야를 안 것은 연구소를 찾기 시작한 때부터였으나 당초에 그에게 그닷한 후의를 보내지 않은 것은 그닷 눈을 끌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가야의 외양이 미란에게 미치거나 혹은 지났던들 미란이 그를 범연히 보았을 리는 만무한 것이요, 그녀의 우월감이 애초에 가야를 얕잡아 보게 한 것이 사실이었다. 슬픈 일이었으나 가야의 외모의 인상은 백 사람 가운데서의 예외의 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백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그의 불행을 결정적으로 판 박아 놓았다. 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눈으로 세상을 본다. 바른 눈이 대상을 볼 때 왼눈은 딴전을 본다. 두 눈의 초점이 각각 달라서 실상은 한 가지 대상을 노리는 것이언만 한편으로 또 다른 한 가지에 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육체적 불행이 그의 인상을 비극적으로 보였고 미란으로 하여금 그를 주의하지 않게 한 것이다. 피차의 용모의 비교라는 것이 여자끼리로서는 거의 운명적으로 일상의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가야와의 경쟁에서 미란은 첫 순간부터 이긴 셈이다. 이기기보다도 먼저 그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데서 부주의가 왔고 안심이 생겼다. 영훈과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게 되면 가야의 시선은 영훈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왼 눈동자는 엉뚱한 미란을 바라보고 있는 결과가 되었다. 한 곳을 목적하면서도 뒤틀려져 나가게 되는 결과――거기에 가야의 비극의 암시가 숨어 있음을 느끼면서 미란은 가야의 영훈에게 대한 감정을 범연하게 추측하고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영훈에게 대한 자기의 자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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