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시대의 벗인 단가
100세시대의 벗인 단가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7.07.28 10:10
  • 호수 5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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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가요에 심취해 살아온 지가 어언 30여 년이 넘었습니다. 어떤 좋은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거기에 식상하기 쉬우련만 가요에 대한 애착은 어쩐 일인지 점점 더해져갑니다. 이 무슨 조화일까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가요라는 문화도구가 지니고 있는 삶의 함축적이고 내밀한 정서, 내밀하게 젖어드는 듯한 기이한 공감력, 가요공간을 통해 들여다보는 민족적 삶의 애련한 발자취와 역사의 향취 따위가 불가분의 매력으로 지속적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의 경우는 젖먹이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어머니의 그리운 옥음(玉音)을 옛 여성가수 노래 속에서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더듬으며 살아오다 보니 오늘의 대중가요 해설, 대중가요연구가 분야에서 전문가적 영역에까지 다다른 듯합니다.

수년 전 전라북도 전주에 백석(白石) 시인을 테마로 한 문학 강연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젊은 부인네가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더늠 ‘쑥대머리’ 가사 전편을 주저 없이 자청해서 완창하는 것을 보며 전주가 과연 판소리의 고장이로구나 라는 감탄을 속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경험은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엉뚱한 착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판소리와 단가가 물론 호남의 것이긴 하지만 출신지역이 다르다고 못할 게 어디 있겠느냐는 판단이 들었고, 나도 한번 독공(獨功)에 독공을 거듭해 대중 앞에 나아가 그간 쌓은 새로운 분야를 반드시 펼쳐보겠노라는 결심을 하게 됐지요. 일단 굵은 글씨로 인쇄한 가사전문을 별도로 준비하고, 그렇게 주로 운전 중에 ‘쑥대머리’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

만약 장거리 운행을 하는 일이 있을 때면 수없이 되풀이해서 듣고 따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400~500회는 훨씬 넘게 들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쑥대머리’ 가사가 입에서 저절로 술술 풀려나오며 가락까지도 익숙하게 흥얼거려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에 자신감을 얻어 임방울의 그 전설적인 악곡 ‘추억(追憶)’을 혼자서 연마했고, 이후로는 곧바로 ‘사철가’에 도전해서 가락과 가사 모두를 암기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한학자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전라감사를 지낼 적에 썼다는 ‘호남가(湖南歌)’까지 모두 익혔고, 다음으로는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신명나게 입 시늉이라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럭저럭 부를 수 있는 레퍼토리가 어언 네 곡이나 되었네요.

앞으로는 ‘심청가(沈淸歌)’에서 앞 못 보는 소경 심학규가 엄마 잃은 젖먹이 딸 청이를 품에 안고 어르는 대목인 ‘어화 둥둥 내 사랑’과 또 다른 단가를 골라볼 요량이지요. 억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즐기며 외우게 되니 이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 흥겹고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벗들의 평에 의하면 이런 암기습관이 뇌세포의 활동을 왕성하게 해서 치매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프랑스의 철학자 알랭은 지난날 ‘행복론’이란 저술을 통해 과거에 억매이지 말고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현실에 주목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적도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내 앞의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아름다운 단가(短歌) ‘사철가’는 그 어떤 철학서적보다도 더 확실하게 일깨워줍니다.

일반적으로 단가는 긴 분량의 판소리에 들어가기 전 목을 푸는 의미로 부르는 5분 내외 정도의 노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현재 불리고 있는 단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으나 그것이 주는 매력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껴볼 도리가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울적한 기분일 때 ‘쑥대머리’, ‘추억’, ‘사철가’, ‘사랑가’ 따위의 격정적 단가를 신나게 목청껏 부르고 나면 희한하게도 꽉 막힌 속이 후련하게 뚫려서 소통되는 느낌을 얻습니다.

저의 경우는 목욕탕에 가서 폭포수의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큰 소리로 단가를 부릅니다. 물소리의 굉음에 가려 제 노랫소리가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습니다. 약 3분 내외의 분량인 대중가요에 비해 단가는 5분 내외의 다소 긴 호흡으로 가사를 음미해가며 즐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ㅁ, ㄴ, ㅇ’ 등의 유성음(有聲音)이 들어가는 대목을 부를 때 입과 코에서의 그 공명음의 진동과 파장이 두뇌와 몸 전체에 골고루 전달되어 몹시 기분이 쾌활해지고 긍정적 사고를 갖게 되는 변화까지 경험하게 되지요. 그런 효과가 어디 단가 하나뿐이겠습니까? 삶의 주변을 자세히 돌아다보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는 얼마든지 수두룩하게 널려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래, 모든 음악은 만민(萬民)이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며 행복감까지도 얻을 수가 있으니 음악이야말로 만국공통의 언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시간, 그리고 숨 가쁜 세상살이의 일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너무 퍅퍅하고 가파르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겨를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즐거움을 얻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세와 선택, 그리고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께서는 음악, 그중에서도 단가를 가까이 사랑하고 즐기면서 여러분 앞에 다가온 시간을 보다 활기차고 그윽하게, 또 기쁘고 행복하게 바꾸어 가시기를 적극 권장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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