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을 찾았을 때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이 옆방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훈을 찾았을 때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이 옆방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7.28 10:52
  • 호수 5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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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6>

그 자신을 시험하고 영훈과 가야의 사이를 엿볼 수 있는 날이 왔다. 미란은 바이엘의 교칙본을 두 달이 채 못 되어서 떼어 버리고는 다음 과정으로 체르니 삼십 번을 시작하고 있었다. 초년생의 신세를 면한 그는 연구소를 찾아 그곳 피아노를 이용하는 때가 많았다. 오후가 늦어서 영훈을 찾았을 때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이 옆방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익은 후이라 목소리도 안 걸고 불쑥불쑥 드나드는 터에 살며시 연습실을 들어선 것이 불찰이었던지는 모르나 옆방에서 흐르는 목소리는 영훈과 가야의 것이었다. 의자에 앉은 후에 새삼스럽게 인기척을 내기도 우스워서 잠자코 있는 동안에 말소리는 한마디 빠지지 않고 들려왔다. 영훈은 철저한 구라파주의자여서 그와 마주앉으면 대개는 이야기가 그 방면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흔히 뜰을 예로 들었다. 정원 안에는 화단도 있고 나무도 서고 풀도 우거지고 지름길도 있고 그늘도 있고 양지도 있는 것, 그 전체를 세계로 보면 그 속에서 구라파의 문화라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화단에 상당하다는 것이다. 색채와 그림자의 여러 폭의 부분이 합쳐서 화단을 중심으로 하고 정원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부분 부분을 숭상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의 구라파주의는 곧 세계주의로 통하는 것이어서 그 입장에서 볼 때 지방주의같이 깨지 않은 감상은 없다는 것이다. 진리나 가난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공통되는 것이어서 부분이 없고 구역이 없다.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저 곳의 가난한 사람과의 사이는 이곳의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보다는 도리어 가깝듯이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것끼리 구역을 넘어서 친밀한 감동을 주고받는다. 이곳의 추한 것과 저 곳의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서 같은 혈연과 풍속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같은 진리를 생각하고 같은 사상을 호흡하고 같은 아름다운 것에 감동하는 오늘의 우리는 한구석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요, 전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동양에 살고 있어도 구라파에서 호흡하고 있는 것이며 구라파에 살아도 동양에 와 있는 셈이다. 영훈의 구라파주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의 교양이 그런 생각을 한층 절실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음악의 세상에서같이 지방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한 세계 속에 조화되고 같은 감동으로 물들어지는 것은 없다. 오래 전부터 그는 「인간의 노래」의 교향악의 작곡을 계획하고 있었다. 탄생, 싸움, 운명, 죽음, 네 악장으로 되는 그 곡조 속의 수많은 주제는 전 인류의 것이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탄생의 기쁨 죽음의 슬픔을 풀어내는 주제는 동양의 것이며 동시에 구라파의 것이요, 구라파의 것이며 동시에 동양의 것이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피아노를 위한 「생활의 노래」는 일곱 제목으로 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것, 사랑, 행복, 잔치, 고독, 슬픔, 사상――즉흥곡의 형식으로 되는 이 일곱 가지의 제목 속에도 역시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류의 감정을 부어 넣자는 것이 그의 계획임을 미란은 알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구해서 직접 구라파로 갈 작정이요. 화가가 그림의 모델을 구하듯이 나두 음악의 모델을 거기서 구할 생각이요.”
그날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영훈의 목소리는 역시 그 구라파주의의 논의였던 것이다.
“왜 이 고장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나요.”
가야의 대꾸였다.
“버려둔 정원이나 빈민굴 같은 속에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고려나 신라 때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있었던지는 모르나 오늘 어느 구석에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흰 옷을 입기 시작한 때부터 빛깔을 잊었고 아악과 함께 음악이 끊어졌고――천여 년 동안 흙벽 속에 갇혀 있느라구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여지나 있었습니까. 제 고장을 나무래기가 야박스러우니까 허세들을 부려 보는 것이지요.”
“흰 옷은 흰 옷으로서 아름답지 않아요.”
“흰 것과 초록과 어느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흙과 페인트와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흰 것이나 흙은 문화 이전의 원료이지 아름다운 것이라구 발명해 낸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의 소꿉질과 같이 알롱알롱한 옷도 생각해 보구 유리창 휘장에 푸른빛도 써보구 하는 대담한 장난이 문화의 시초였고 그런 연구 속에서 아름다운 것도 생겨 나오는 법이지 재료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나요.”
“자연두 아름답구 풍속두 아름답구 인물두 아름답구……”
겸연쩍은 듯이 가야의 말꼬리는 가늘게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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