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일남 “‘쌍쌍파티’ 테이프 원조는 저… 조미미 등과 5000곡 불렀어요”
가수 박일남 “‘쌍쌍파티’ 테이프 원조는 저… 조미미 등과 5000곡 불렀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7.28 10:55
  •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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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의 순정’ 100만장 판매 기록… 박정희 대통령 전용 가요테이프 만들어
문화예술인 586명 위패 절에 모시고 추모제 열어, 무료요양병원도 짓는 중

가수 박일남(72)하면 ‘갈대의 순정’을 부른 저음의 가수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이 많다. 그는 번듯한 절을 소유하고 있고 그 절에서 작고한 예술인 586인의 위패를 모시는 ‘위패 안치식’을 치렀다. 최근에는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무료요양병원 건립을 추진 중이다. 박씨는 현재 130만명을 회원으로 둔 전국예능인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기도 하다. 지난 7월 말, 서울 역삼동 개인 사무실에서 만나 적극적인 사회 활동과 가수의 삶을 들었다.

-위패 안치식…처음 듣는 말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씨 유골이 다들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사정이 딱하게 된 겁니다. 그걸 보고 안되겠다 싶어 사회에 공헌을 한 예술인들의 위패를 한 자리에 모시게 됐어요.”
행사의 정식 명칭은 ‘제1회 문화예술인 합동 추모제 및 위패 안치식’이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을 비롯 최근 의료사고로 사망한 가수 신해철까지 사회에 공헌한 예술인들을 모셨다. 박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전국예능인노동조합연맹이 주최했다. 이날 행사 규모가 컸다. 윤항기‧전영록‧옥희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대 종파의 종교의식이 치러졌다.
-이 행사에 대한 연예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다들 좋아하지요. 설운도의 어머니가 무명가수로 살다 유명을 달리했어요. 이번에 행사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려진 사실입니다. 설운도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오기도 했어요. 내년부터 매년 6월 25일에 할 겁니다.”
-왜 그날인가.
“우리나라 문화예술인들은 독립운동도 했고 6‧25 전쟁에 참전해 총칼을 들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위문공연도 했습니다. 그런 정신을 기리기 위해 택한 겁니다.”
-행사 장소였던 절이 본인 소유라고.
“아내가 가평 명지산의 ‘대성사’란 자그만 절 비탈길을 오르다 다쳤어요. 제가 길을 내주려고 갔다가 절 소유주로부터 사정을 듣고 떠맡게 된 겁니다.”
-무료요양병원 건립 이야기도 신선하게 들린다.
“절 옆에 공터가 좀 있어요. 문화예술인들 중에 어려운 이들이 많아 그분들 위해 200병상의 3층짜리 병원을 지으려고 합니다.”
-운영이 힘들지 않을까.
“정부의 지원금을 병원에 모두 사용하면 서울대병원 못지않은 훌륭한 시설을 꾸려갈 수 있어요. 중간에서 그 돈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문제인 거지요.”

박일남씨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인터넷 상에 45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다. 박씨는 “인터넷을 어떻게 다 믿느냐. 나이가 알려지면 장사 안된다”며 웃었다. 동국대 불교철학과를 나와 1963년 ‘갈대의 순정’으로 데뷔했다. 그 외 ‘엽서 한 장’‧‘그리운 희야’‧‘정 주고 내가 우내’‧‘마음은 서러워도’ 등 11곡의 히트곡이 있다. 가수협회장을 지냈고 처음으로 가수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박일남씨가(오른쪽) 7월 2일 '아트센터 달'에서 본지에 컬럼을 연재하는 이동순 전 영남대 교수와 함께 '유랑극단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르게 됐나.
“1960년대 북창동, 남대문 근처에 술 마시고 춤추고 하는 클럽들이 많았어요. 어릴 적 배운 풍금 솜씨로 클럽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도 하고 술도 얻어 마시곤 했어요. 어느 해 설날 클럽 악단이 부평의 ‘백마장’이란 곳에 연주하러 가는데 따라가게 됐어요. ‘막이 오르자마자 나가는 가수’로 무대에서 냇킹 콜의 ‘모나리자’를 불렀더니 앙코르를 4번이나 받았어요. 노래 잘 한다는 소문 듣고 찾아온 킹레코드 관계자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게 된 겁니다.”
-‘갈대의 순정’ 인기가 대단했다고.
“30만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0만장이 팔렸어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150만장이 나갔지요.”
-돈도 많이 벌었겠다.
“아니요. 제가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난폭해 사고를 많이 쳤어요. 은행이란 델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요.”
-후회하나.
“후회는 안 해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이 있잖아요.”
-그 노래와 관련한 에피소드라면.
“처음 작곡자(오민우)에게서 곡을 받았을 때 마음에 안든 부분을 제가 고쳤어요. 사나이 순정을 갈대의 순정으로 제가 바꿨어요. 요즘처럼 작곡자를 엄격하게 가렸다면 공동작곡가로 제 이름이 올라갔을 겁니다.”
-‘갈대의 순정’만 많이 알려져 있다.
“후속곡 ‘엽서 한 장’도 인기가 좋았어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많이 팔리는 ‘쌍쌍파티’ 테이프 있지요. 제가 그거 원조에요. 1970년대 조미미‧정훈희 등과 함께 ‘쌍쌍파티’ 테이프 만들어 히트했어요. 제가 부른 노래가 5000곡 정도 됩니다.”
-저음의 가수로 불리지만 음역의 폭이 넓다.
“작곡자들이 노래 시켜보고 마음에 안 들면 마지막으로 저를 불렀다고 해요.”
-절정기는 언제였나.
“1960~70년대이지요. 여자 가수로는 이미자‧박재란 등이, 남자가수는 오기택‧남인수 등이 유명했어요.”
-가수 생활하면서 잊지 못할 일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 전용차에 스피커가 앞뒤로 달려 나왔어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이 들을만한 가요테이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가 ‘산팔자 물팔자’‧‘복지만리’‧‘나그네설움’ 등 40여곡을 불러 만들어드렸어요.”
-청와대로부터 고맙다는 인사가 없었나.
“‘촌지’라고 쓴 봉투 속에 지금 가치로 따지면 500만원 정도 되는 돈이 들어 있었어요. 동료들하고 맘껏 술 마셨어요.”
-가장 감동적인 무대는.
“KBS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가요무대’였어요. 리셉션도 하고 이미자 등 20여명의 가수가 함께 노래 불렀어요. 가수란 직업에 자부심도 느꼈고 그 자리에 서게 된 게 영광스럽기도 했습니다.”
-노래 외에 사회활동도 적극적이다.
“가수협회 회장을 지낸 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가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위원장을 했습니다.”
-가수와 노동조합은 어울리지 않는다.
“정착하는 과정에 힘이 들었어요. 정부에서도 ‘가수가 무슨 노동자냐’ ‘너희들 돈 잘 벌지 않느냐’ 고 처음엔 부정적이었지요. 가수들 스스로도 방송사에서 ‘너 노동운동했지’ 하며 방송 금지시킬 것을 우려해 가입을 꺼리기도 했고요. 10년 고생한 끝에 지금은 정착이 됐습니다.”
-어떤 경우에 조합이 필요한가.
“조합원이 출연료를 떼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저희가 조정위원회에 나가 사용자 측으로부터 출연료를 대신 받아주기도 합니다. 저작권협회, 음원협회도 쟁의 대상이지요.
-노인 대상의 강연을 많이 다닌다고.
“3년 전부터 전국을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제가 살아온 이야기도 들려주고 합니다.”
-경로당에서 노인들이 노래를 많이 부른다.
“가수 중에 치매 걸린 이가 거의 없어요. 노래하면 치매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가사 외우고 멜로디 익히고 박자 맞추는데 머리 많이 써야 하거든요.”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률‧자살률이 높다.
“노인들의 문제입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시간 보내지 말고 젊었을 적 했던 일을 계속해 사회에 기여했으면 좋겠어요. 가령 퇴직한 직장에 다시 나가 경비 같을 일을 하며 봉사하는 것도 좋고요. 제가 지금도 신곡을 내는 이유가 ‘나도 이 나이에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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