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에게는 영훈의 선언이 청천의 벽력같이도 들리면서 몸에 식은땀이…
미란에게는 영훈의 선언이 청천의 벽력같이도 들리면서 몸에 식은땀이…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8.04 11:31
  • 호수 5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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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7>

“외국 사람의 말을 들으면 이곳의 자연이 유독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 같구 사람으로 해두 터가 든든하구 등 뒤의 믿는 것이 굳은 때에 인물이 나는 법이지 빈민굴 속에 인물이 있으면 얼마나…….”
영훈의 말소리도 거기에서 흐려졌다. 사실 그의 말속의 한 사람으로서의 미란도 그의 판단에 낯이 뜨거워지면서 가야의 앞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인물에 대한 단정을 내리는 것이 여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를 느끼며 자기 도 그런 대상의 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멸 속에서 어떻게 사세요.”
“그러게 예술 속에서 살죠. 꿈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서 살죠. ――그것이 누구나 가난한 사람의 사는 법이지만. 주위의 가난한 꼴들을 보다가두 먼 곳에 구라파라는 풍성한 곳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느낌이 나면서 그래두 내뺄 곳이 있구나 하구 든든해져요.”
“구라파로만 가면 그 꿈이 채워질까요. 또 새로운 환멸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건 그때의 일. 아름다운 것을 흠뻑 보구 듣구 하면서 그 영감 속에서 맘먹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스럽겠죠. 「생활의 노래」 속의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곳 생활 속에 살면서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볼 작정입니다. 예술두 보고 생활두 보구 고전두 보고 현실두 보구.”
“사람이 그런 마지막 피난처를 가질 수 있다면 오직 행복스럽겠습니까. 궁할 때에 도망질해 갈 수 있는 그런 마지막 구원을 가질 수 있다면.”
미란은 마주앉아 가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건만 옆방에서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두 눈으로 영훈을 곧바로 바라보려고 애쓰는 것이나 왼눈은 한결같이 빗나가서 딴전을 본다. 영훈은 그 양(樣)이 민망해서 똑바로 그를 맞보지 못하고 외면해 버린다. ――그런 그들의 모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도 하다.
“그 어느 하룻밤이나 꿈속에서 갑재에게 쫓기지 않는 날이 있을까요. 쫓기다가는 구렁 속에 빠지구 바다에 떨어지구. 그러나 바다나 구렁 속두 피난처는 못 돼서 거기까지 쫓기구 나면 전신에 진땀이 쪽 내배군 해요. 제겐 마지막 피난처가 없어요. 마지막 구원이 없어요.”
영훈의 말까지에는 한참이나 동안이 떴다.
“예술에 더 힘쓰실 수두 있겠구…….”
잔인한 권고였으나 미란에게는 그 한마디가 구원의 목소리로 들렸다.
자릿자릿한 마음으로 동정을 살피고 있던 그로서 가장 듣고 싶던 결론의 한 마디를 들은 셈이었다.
“예술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그만한 기품이 없이 어찌 어려운 예술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예술이 인생의 전부란 말씀이죠.”
“그 요량을 하여야죠. ――예술의 길에 있어서는 전 언제까지나 좋은 동무 되어 드리겠습니다.”
남의 일이면서도 미란에게는 영훈의 선언이 청천의 벽력같이도 들리면서 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판이었다. 사랑의 까막잡기를 하다가 상대자의 선언을 들었을 때같이 세상에서 두려운 때가 있을까. 두 사람의 말소리는 그것으로 끊어진 채 어느 때까지나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그 다음은 말이 아니고 가야의 울음소리가 들릴 차례가 아닐까 하면서 미란은 그것을 조바심하고 기다리게 되는 무서운 순간이었다…….
미란은 우연히 그들의 말을 엿듣게 된 그것만으로도 허물이나 저지른 듯 가야에게 대해서는 그의 중대한 비밀을 훔쳐낸 듯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우연한 기회로 영훈과 가야의 내용을 확실히 안 셈이었고 가야의 비극의 인상을 확적히 손에 잡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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