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유명 여성앵커의 치매 의사 남편 20년 눈물 간병기
미 유명 여성앵커의 치매 의사 남편 20년 눈물 간병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8.11 13:23
  • 호수 5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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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요양시설로 보내고 내 인생 찾아야 할까…그렇게 할 순 없었다”

미국의 유명 여성앵커로 ‘에미상’을 수상한 메릴 코머는 1996년 당시 미국 국립보건원 소속의 의학박사였던 남편 하비가 58세의 나이에 조발성 알츠하이머형 치매에 걸리자 일을 그만두고 남편의 간병에 매달렸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치매에 걸려 메릴은 한동안 한 집에서 두 치매 환자를 돌봐야 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편 곁을 떠나지 않은 메릴은 그간의 눈물겨운 간병 체험을 ‘낯선 이와 느린 춤을’(MID·2014년)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메릴은 현재 제프리 빈 알츠하이머병재단의 CEO로서 알츠하이머병의 조기 발견과 예방을 위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 책의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남편 하비는 국제적 명성 가진 백혈병 전문의… 58세에 알츠하이머성 치매 걸려
그의 활기찬 목소리 듣고 싶어 자동응답기 듣곤 해 “안녕하세요, 메릴과 나는…”

1980년대 초 하비와 나는 결혼했다. 하비는 세 번째고 나는 두 번째다. 하비와 나에겐 아들이 각각 한명씩 있고 이후 우리는 자식을 낳지 않았다. 하비는 1960년 이후 줄곧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일했다. 그는 백혈병 전문가로 학계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으며 학회 발표나 개인적인 논문 발표 때문에 자주 유럽을 다녔다.
우리의 결혼생활 내내 하비에게는 자기 연구와 환자가 늘 우선이었다. 명절에도 일하거나 휴가를 취소했다. 일을 하거나 출장을 가는 스케줄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은 주로 주말이었다. 우리는 집에 같이 있으면서 뉴욕타임스 일요일판을 읽었다.
하비가 머리가 좋고 자기중심적이며 전형적인 과학자라는 사실은 그가 일하는 사무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사무실 바닥은 논문과 서류들로 가득 덮여 있었다. 하비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어떤 논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기가 막힌 능력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했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처음 느낀 건 하비의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그이가 서류더미에서 뭔가를 찾아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순간이다. 누군가가 항상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 못한다면 그건 치매의 초기 신호로 보기 힘들다. 하지만 평소 하던 행동에 변화가 생기거나 평소에 잘 할 수 있었던 능력이 저하된다면 문제가 다르다. 하비가 서류를 찾지 못하는 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비의 성격은 돌발적이 돼 갔다. 밖에선 최선을 다해 억제하고 있다가도 집에만 오면 성질이 폭발했다. 어느 해 추수감사절, 가족끼리 저녁식사 자리였다. 내 아들 제이슨과 약혼녀도 함께 했다. 제이슨이 칠면조 자르는 걸 돕겠다고 나섰을 때 하비가 갑작스레 고함을 치며 “이 집안 가장의 역할을 가로챌 생각을 하지 말라”며 제이슨에게 호통 쳤다. 그리고 갑자기 나이프를 식탁에 내던지고 밖으로 나가 차를 타고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돌아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나와 하비의 동료들은 하비에게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볼 것을 권유했고 하비는 워싱턴 근교에 위치한 국립해군병원의 두뇌외상 전문가를 만났다. 결과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치매일 가능성이 65%로 나타났다. 진단 결과에 의해 만 하루도 안돼 하비는 장애로 인해 퇴직하는 것으로 처리됐다. 그리고 국립보건연구원 출입금지는 바로 시행됐다.
초기엔 몇몇 사람이 하비를 찾아와 위로하려 했으나 이를 지켜보는 나로서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비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들도 너무나 달라진 하비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어느 날 밤 일찌감치 누운 하비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왜 자기 침실에 내가 있는 거냐”고 물었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하비는 우리가 결혼한 사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희생을 인정했다. “당신이 정말 내 아내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당신에게 너무 가혹하네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혼해야 하나. 나는 그를 사랑했고 즐거울 때나 힘들때나 서로 보살피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를 요양시설로 보내고 내 인생을 찾아 나설까. 사는 게 고통이니 그가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나. 하지만 그건 비도덕적이며 절대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비는 절제하는 능력도 사라졌다. 집에서도 휴지통이나 서랍이나 화분 근처 배수구에 그가 소변을 봐놓은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하곤 했다. 그래도 가능하면 하비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극을 받아 사라져가는 기억력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그를 데리고 나갈 때는 목욕시키고 면도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느라 녹초가 되는 바람에 내 옷은 서둘러 입어야 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날 때쯤이면 이렇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비는 우리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비를 종합병원에 보냈다가 나중에는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런데 하비의 행동이 계속 문제가 됐다. 하비가 음악 시간에 어떤 여성 입소자에게 다가가서 바지를 벗었다는 요양원 측의 보고가 나왔다. 우리의 간병인이 하비가 성기를 노출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 하비를 요양병원에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비를 집으로 데려왔다.
하비의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한 번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걷지 못하게 된 이후로 휠체어 신세가 됐다. 우리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비는 그나마 남아있던 언어능력마저 모두 잃어버렸다. 의사는 치매 말기 증상이라고 했다.
하비는 현재 77세(2014년 당시)이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지 20년이 됐다. 전문 간호사는 “하비가 이렇게 오래 살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일지에 기록했다. 지난 2년 동안 하비는 머리를 똑바로 들 수 없었고 우리가 그의 목을 마사지해 주어도 음식을 삼키지 못했으며 발작을 일으켰고 피부는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전문 간호사는 “환자는 보살핌을 너무나 잘 받고 있어서 환자의 신체가 환자의 뇌보다 오래 살아 있다”고 보고서를 써냈다.
나는 가끔씩 지금은 잃어버린 그의 활기찬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전화자동응답기의 녹음메시지 버튼을 누르고 같은 메시지를 듣고 또 듣는다.
“안녕하세요. 메릴과 나는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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