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이 건반 위에 놓여졌다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이 건반 위에 놓여졌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7.08.18 13:19
  • 호수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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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49>

슬픈 속에서는 마음이 체로 밭친 듯이 맑게 고여 복잡하던 미란의 감정도 적어도 그 순간에는 불순하고 지저분한 티를 흘려버리고 가야와 같은 감정으로 변해지고 개여 갔다. 영훈이 들어온 까닭에 그 감정을 제대로 되돌리기에 한참 동안의 노력이 필요했다. 책상 위에 널려진 종이들을 미처 수습할 새도 없이 목소리가 가까워 왔다.
“또 편집니까.”
자기가 먼저 헤쳤던 그날 편지를 내보이면서 미란은 서랍 속에 묵은 편지 묶음을 황급하게 몰아넣었다.
“비밀을 헤쳐 보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나――변명으로 들으셔두 할 수 없구요.”
“언제나 한번은 말씀드리려구 한 것인데.”
편지 뒤로 보냈던 시선을 돌리면서,
“가야는 시인예요. 나더러 작곡을 해달라구 수많은 시를 적어 보내나 제 정성이 미치지 못해서――”
“왜 아름다운 반주를 붙여 드리지 못해요. 고운 멜로디와 고운 화음으로.”
“감동 없이 곡조가 생기나요. 영감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운명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기다려두 메마른 감동 속에서는 솟는 법이 아니거든요. 모두가 슬픈 노래――샘같이 솟는 그 흔한 슬픈 감정을 일일이 좇아갈 수가 없어요.”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이 건반 위에 살며시 놓여졌다. 곡조에 맞춰 입에서 노래가 새어 나왔다.
서글픈 날이었다 / 길을 걸어도 / 길을 걸어도 / 마음속 허붓한 /서글픈 날이었다 / 눈물 그칠 줄 모르고……
베토벤의 「어두운 무덤 속에」와도 같은 무거운 화음이 방안에 찼다. 영훈은 눈을 감고 마치 자기 자신의 노래인 듯 동정에 넘치는 조화된 즉흥의 한 곡조였다. 곡조가 끝나도 침통한 리듬이 방안에 배어 귀에 쟁쟁하다.
“또 한 곡조――”
건반 위로 손가락을 달렸다.
그림자 속에 빛 있으니 / 흔들리는 꽃송이 / 제발 꺾지 마소…….
“모두 이런 슬픈 노래――.”
돌아앉으면서 탄식하는 듯이 미란을 바라본다.
“그 슬픈 노래를 모두 즐거운 것으로 고쳐 쓰게 할 분은 영훈 씨밖엔 없잖아요.”
“운명이랄 수밖엔 없어도――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선언과도 같았다. 미란은 몸이 오싹해지며 단순한 그 사실에 대한 동정만이 그 순간 일어났다. 인생이라는 것이 결코 뜻대로만 수월하게 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추상같이 엄격한 고비도 있으니 깨달아지면서 엷은 얼음장을 디디고 선 듯한 느낌이 솟았다.
“왜 어쩔 수 없나요.”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죠.”
“그게 운명이란 건가요.”
“그렇게 마련된 건 마련대로밖엔 안 되거든요.”
아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인생의 신비를 또 한 토막 발견했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구라파로 내빼신단 말씀인가요.”
“원하는 고장이니까 간다는 게죠. 콕토를 만나구 작곡가 라벨을 만나구 아름다운 것이라는 건 죄다 모아서 세계의 ‘아름다운 것’을 노래해 볼 작정으로요――”
“아름다운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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