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이름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이름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7.09.01 13:25
  • 호수 5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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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순’이란 튀는 이름 탓에
이름을 속이기까지 했던 나

동창 때문에 본명이 폭로된 뒤
당당히 ‘을순’이라 밝히기 시작

이젠 만사 편하고 주눅 안들어

언년이, 끝순이, 막순이, 말년이, 그리고 을순이. 예전 우리 어르신들의 흔한 여자 이름들이다. 지금 연세가 70~80세 되신 분들에겐 그다지 특이하거나 어색하지도 않지만 이제 막 예순이 넘은 내게 을순이란 이름은 나의 성장기를 너무도 가혹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의 새 학기 첫 수업하는 날. 선생님이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출석 체크를 할 때면 반 전체가 웃음 바다가 되곤 했다. 완전 TV 예능프로의 한 장면이다. “언니 이름은 갑순이냐”로 시작해 “난 어물선인줄 알았다”로 끝나는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멘트. 무척 괴로웠다. 그 후로도 내 이름은 수업시간만 되면 칠판에 적히는 단골이름이 됐다.
‘갑순이가 10개를 먹고 을순이가 5개를 먹었다면 남은 것은?’ 등등. 그럴 때마다 웃는 아이들 얼굴을 쏘아보며 인상을 쓰곤 했던 나.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정해져 버린 이름 덕분에 난 점점 튀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튀는 이름은 튀는 아이를 만든다. 을(乙)순(順). ‘새 을에 순할 순’, 새처럼 착한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을미년에 태어났다고 그리 지으셨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 어린 내 맘에는 무슨 이유에서든 이름 때문에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사실 내게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 부모님조차도 할아버지가 지어서 호적에 올린 을순이란 이름을 촌스럽다고 생각하셔서 애칭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애칭이 바로 미숙이란 이름이다. 그래서 학교에선 을순이가 되고 집에 가면 미숙이가 됐다.
대학시절 미팅을 할 때, 잠시 볼 사람들에게 구태여 본명까지 얘기하며 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싶지 않아 그때마다 내 이름은 미숙이었다. 그렇게 슬쩍슬쩍 이름을 속이기(?) 시작하며 살다가 미국 유학시절 된통 망신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내가 있었던 텍사스 대학 근처에는 한국식품점이 없었다. 차로 두 시간은 족히 운전을 하고 나가야 했기에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장을 보러 가곤 했다. 
어느 날 유학생 부인들 다섯 명이 한차에 타고 장을 보러갔다. 오랜만에 라면도 사고 떡도 사고 부지런히 장을 보고 있는데 식품점 안에서 고교 동창생을 만났다. “너 을순이 맞지?” 난 얼굴이 빨개지면서 일단은 그 자리를 피해보려고 애를 썼다. 유학생들 사이에서의 내 이름은 미숙이었기  때문이다. “야, 예전 모습 그대로네. 을순이 맞잖아.” 앙드레 김 본명이 김봉남이라 했던가. 그 이름이 들통 났을 때 봉남님의 심정이  내 심정과 비슷했으리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갈 때까지 가고 말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 몇 마디를 하고는 차에 올랐다. 집에 돌아가는 두 시간 내내 같이 탄 일행들은  내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애써 얼굴을 피하는 듯했다. 차라리 내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 이름을 속인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그랬다면 애칭이 어쩌고저쩌고 할 말도 많았고 맘도 더 편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줄곧 지금까지, 언제 어느 곳을 가던지  당당하게 내 이름을 밝힌다. 콤플렉스였던 이름을 막상 오픈해 버리니깐 그 다음엔 만사 편하고 어디 가서 주눅들 필요도 없다. 어쩌면 콤플렉스라는 것은 오픈하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 오픈하자마자 자유가 내 앞에 턱 버티고 있더란 말이다.
이젠 언니가 갑순이냐고 묻는 그 뻔한 질문에도 능수능란하게 대처를 잘한다. 십 오년 쯤 전인가. 드라마 ‘서울의 달’ 작가인 김운경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내 이름을 소개하자 대뜸 “이름이 참 겸손하십니다. 갑순이가 아니고 을순이라 했으니 평생 갑질 하지 말고 을의 맘을 가지고 사신다는 거잖아요.”라고 했다. 이름풀이 한번 참으로 훌륭하다. 그렇다. 요즘같이 너도나도 갑질하는 세상에 홀로 우직하게‘난 을이요’하는 그 겸손한 마음 자세. 참으로 멋지다. 
갑질하는 사람들 얘기가 종종 들려온다.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하다가 불구속 기소되었던 모 제약회사 사장님. 땅콩 서빙 잘못했다고 제 맘대로 비행기를 회항시킨 모 그룹 회장 따님의 그 유명한 땅콩 갑질. 공관병에게 호출용 전자 팔찌까지 채워 가며 심부름을 시킨 모 육군 대장 부부의 갑질 등등.
갑과 을의 관계, 평생 갑인 사람이나 평생 을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갑이었다가도 다른 곳으로 가면 을이 된다. 권력의 대명사격인 대통령도 지금 구치소에 있는 걸보면, ‘갑중의 갑 슈퍼갑’인 대통령도 국민 앞에서는 을이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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