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주춧돌 남은 절터에서 노인들은 인생·역사의 체취 느낄 듯”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주춧돌 남은 절터에서 노인들은 인생·역사의 체취 느낄 듯”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9.01 13:35
  • 호수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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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첫 답사기… ‘서울편’ 포함 총 14편, 인문서 첫 380만부
“문화재청장 시절 전국의 문화재 향유하도록 개방한 일 기억 남아”

누적 판매 380만부로 인문서 최초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국민적 답사 열풍을 일으켰으며 ‘아는 만큼 보인다’, ‘전국토가 박물관’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993년 강진과 해남 땅 끝에서 시작한 답사기가 북한과 일본을 거쳐 24년만인 지난 8월 중순, 서울로 돌아왔다. 현재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로 있는 저자 유홍준(68) 전 문화재청장을 만나 답사기를 쓰면서 겪은 일들, 지난 8월 중순에 펴낸 ’서울편‘(창비)에 대해 들었다.

-어떻게 답사기를 쓰게 됐나.
“1991년 ‘사회평론’이란 진보진영 잡지를 만들 때 그 잡지에 답사기를 여럿이 돌아가며 쓰기로 했어요. 근데 다음번 답사기를 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혼자 계속 쓰게 됐지요.”
­-이번에 새로 펴낸 ‘서울편’은 어떤 내용을 담았나.
“서울은 궁궐의 도시이니까 5대 궁궐을 썼고 유교 국가였던 조선왕조의 중요한 유산인 문묘(성균관)와 무묘(동관왕묘)에 대해서도 썼어요.”
-궁에 살던 사람에 중점을 두었다고.
“낙선재 건물을 보면 헌종이 살려고 지은 겁니다. 추사를 좋아하고 문기(文氣) 있는 이라서 단청을 하지 말라고 해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없어요. 편안한 양반집 사랑채를 보는 분위기입니다. 그 낙선재가 조선왕조 멸망 후 일제 강점기에는 왕손들이 마지막으로 지냈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하철 1호선 역 이름이기도 한 ‘동묘’ 얘기도 인상적이다.
“동관왕묘는 삼국지 관우를 모시는 무묘에요. 사후에 신격화 돼 관왕으로 받들어졌고 동쪽에 위치한다는 말이에요. 중국에도 여기만큼 멋진 관우 조각이 있는 곳이 없어요. 제대로 복원하면 유커 유치에 좋은 자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답사하면서 본 중 으뜸인 문화유산은.
“누가 봐도 예술적으로 동시대적으로 봐도 8세기의 석굴암 같은 명작을 만나기 힘들어요. 전 세계 불상조각들을 다 모아놓더라도 그랑프리를 받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시멘트, 기중기도 없던 시절, 돔 구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해요. 설계와 시공 거기에 종교‧과학‧예술 그것이 다 들어가 있어요.”

유 교수는 “경주 안압지도 뛰어난 문화유산 중의 하나”라며 “안압지라면 통일신라왕이 여기서 파티하다 망했다는 식으로만 가르쳤지 문무대왕이 지루하고 힘겨운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 승리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투구를 벗어 묻어버리고 군사문화의 폐기장으로 삼은 뜻 깊은 곳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인이 보면 좋을 문화유산은.
“그런 건 없고요. 제가 답사에 초‧중‧고급이 있다고 했어요. 절집으로 얘기하자면 불국사‧송광사‧법주사 등 큰 절들, 쉽게 말해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 절은 초급이고요. 강진의 무위사, 화순 쌍봉사는 입장료가 없어요. 관리인을 두면 인건비가 안 나오니까요. 그런데는 조용한 분위기로 중급입니다. 고급이라면 우리나라에 있는 4500여개의 폐사지입니다. 합천 영암사 터는 드라마틱합니다. 절터에 주춧돌과 석탑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가 보면, 젊은이들이 봤을 때는 썰렁하지만, 나이든 이는 거기에서 오히려 인생과 역사의 체취와 호젓함을 느낄 겁니다. 불국사도 젊었을 때 보다 나이 들어 볼 때 훨씬 다가오는 게 많을 겁니다.”

유홍준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나왔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10여 차례 갖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 교수, 문화재청장(2004~2008년)을 역임했다. 미술사 저서로 ‘국보순례’ ‘명작순례’ ‘화인열전’ 등이 있다. 제18회 만해문학상(2003년) 등을 수상했다.

-문화재청장 시절 업적이라면.
“우선 문화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개방해놓은 거죠. 그 전에는 지자체마다 관광지에 오라고 선전해놓고는 다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합니다. 목조건축물은 사람의 손을 타야 활기를 얻어요. 신을 벗고 드나들면 청소도 하게 되고 그런 게 오히려 보전입니다. 문을 닫아놓고 관리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건 없어요.”
-산림청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도 놀랍다.
“광화문‧숭례문을 복원하는데 대들보로 쓸 목재가 없어 캐나다에서 수입했어요. 울진 소광리 150만평에 1000그루가 넘는 금강송림이 있어요. 150년 간 절대 베지 못하고 이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복원 등에 쓸 수 있도록 당시 산림청장과 MOU를 맺고 그 내용을 타임캡슐에 담아 땅에 묻었어요.”
-새로 지은 남대문이 과연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다들 오해를 하는데 언제 새로 지었나요. 일층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단청도 있고 단지 불이 난 2층만 고친 겁니다. 중환자실에 있던 걸 고쳐서 살아난 건데 마치 죽은 것으로 매스컴에서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를 한 겁니다.”

유 교수는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8년 2월 발생한 숭례문방화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는 “실화가 아니고 방화이고, 문화재 관리는 지자체(서울시)에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억울하다”며 “그래서라도 숭례문은 반드시 서울편 3권에 쓰겠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문화재 복원에 대해서 중국의 예를 들어 색다른 견해를 소개했다. 중국 후안에 황학루라는 9층짜리 누각이 있다. 댐을 만들면서 누각이 언덕으로 올라갔다. 복원한 누각 2층에 당‧송‧청‧원‧명나라 때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모습이 제각각이다. 모형 밑에 ‘역대 황학루 중에서 현재가 최대 규모다’라고 써놓았다. 유 교수는 “우리는 복원하면 옛날 그대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반면 중국은 ‘이 시대의 황학루를 짓는다’는 개념”이라며 “중국 측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생각할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 문화유산과 중국‧일본의 문화유산이 어떻게 다른가.
“조선의 예술을 사랑한 일본 민속예술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도자기에 비유해서 적절한 말을 했어요. 조형의 세 가지 요소가 형태‧선‧색채인데 세 나라는 같은 문화권이면서도 중국은 형태미를 강조했고, 일본은 색채, 한국은 선의 아름다움이 강조됐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도자기는 너무 위엄‧권위적이라 높이 올려다놓고 보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다 놓고 사용하고 싶은 반면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고 싶어지는 손맛이라고 했어요.”
-미술사를 전공했다.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화가라면.
“위대한 화가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입니다. 단원은 60평생 살면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 예술 수준이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요. 그가 없었다면 우리가 그 시대 이미지를 어떻게 잡았겠어요. 겸재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이입니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는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통쾌합니다. 그게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진경산수’란 장르를 만들어냈어요. 그 전에는 중국에 주눅이 들어 중국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물을 그려도 조선 선비가 아니라 중국 사람인지 모르게 그렸어요. 겸재는 우리가 즐기는 시각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려냈어요.”
오현주 기자 fatboyo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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