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전 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 “대한노인회 창설 주역… 한국노년학회 창립도 주도했지요”
박재간 전 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 “대한노인회 창설 주역… 한국노년학회 창립도 주도했지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7.09.08 13:30
  • 호수 5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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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복지법‧경로우대제도‧노령연금 등 초창기 노인복지제도 정착에 기여
93세에도 ‘노인복지발달사’ 집필…“나 죽으면 역사 얘기해줄 사람 없어”

대한노인회 창설 주역 박재간(93) 전 한국노인문제연구소 이사장 겸 소장. 대한민국의 노인복지역사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경로우대증서부터 최초의 노인복지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그에게서 노인회 초창기 시절과 노인복지가 나가야할 방향 등에 대해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한국노인복지발달사’를 쓰고 있어요. 내년 쯤 나올 예정이에요. 내가 죽으면 우리나라 노인복지발전 과정의 전반을 재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사명감 같은 걸 느꼈어요.”
-대한노인회 창설에도 관여했다고.
“1969년 4월15일, 서울 종로의 ‘영화장’이라는 음식점에서 서울‧부산‧인천 등 전국의 경로당 회장 70여명이 모여 대한노인회를 창설할 것을 결의했어요. 내가 창립취지문과 정관을 기초했지요.”
-어려움은 없었나.
“왜 없었겠어요. 사단법인 등록절차를 아는 이가 없어 등록서류 작성부터 모든 걸 도맡아 했지요. 사무실이 없어 청와대를 찾아가 육영수 여사에게 부탁해 현재 쓰고 있는 효창동 중앙회 건물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당시 전국의 경로당이 320개소, 회원 수는 6500여명이었어요.”

박재간 전 소장은 대한노인회 초대사무총장으로 5년여 일했다. 정부 보조가 없던 터라 자부담으로 사무실 운영비, 직원 인건비 등을 대며 전반적인 기초를 닦았다. 그는 또. 1973년 사재를 털어 한국노인문제연구소를 세웠다. 노인복지정책을 개발해 정부에 건의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30여년간 연구논문집 40여권을 발간했고 학술세미나 강연회를 700여회 개최했다. 노년학 2,3세대 학자들이 마땅한 연구자료가 없다보니 연구소를 도서관처럼 이용했고 70~80명이 연구소에서 자료를 뒤져 박사학위를 땄다. 박 전 소장은 “그들과 밤새 토론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스승의 날이면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아오는 교수들이 아직도 여럿 돼”라며 웃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노인복지 불모지나 다름없었는데.
“1970년대 우리나라는 아동복지법과 부녀복지법은 있었지만 노인복지법은 없었어요. 선진국들의 법적제도를 알아보려고 자비 부담으로 유럽 4개국과 미국‧일본 등지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어요. 그 책을 토대로 노인복지법을 만들어 국회에 입법청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1980년 12월에 비로소 국회를 통과했어요.”
-경로우대증을 처음 만들었다고.
“1981년, ‘한국의 집’에서 당시 이규동 대한노인회장, 전두환 대통령과 오찬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핵가족화로 노인들이 경제력을 잃어가니 우리도 선진국처럼 노인교통비를 면제해주자’고 건의했습니다. 물론 과장이었지요.”

그로부터 몇 주 후 지하철 무료승차, 철도요금 30% 할인제도가 실시됐다. 그리고 다음 달 교통부장관 주관으로 전국 487개 버스회사 사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고, 그 자리에서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기로 결의했다. 경로우대제도의 시작이었다.

-한국노년학회도 만들었다.
“1978년 국제노년학회에 참관했다가 우리나라 학자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몇 몇 교수를 설득해 그해 12월에 창립총회를 열었어요.”

박재간 전 소장은 1924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에 있는 다이세이중, 스가모고교를 졸업했다. 와세다대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1회 졸업생이다. 대한노인회 초대사무총장, 고문을 지냈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1973~2005년), 한국노년학회 회장(1978~2005년)을 지냈다.

-일본 유학까지 갔다.
“황해도 옹진군 농협의 예금 70%가 부친 돈일 정도로 여유가 있어 우리 삼형제 모두가 일본 유학을 갔어요. 생전의 부친은 ”(돈은 얼마든지 대줄테니) 좋은 일 많이 발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사명감에 내 돈 써가며 노인복지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에는 무얼 했나.
“교수들이 일본 책을 번역해 가르치는 걸 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영국의 지인을 통해 원서를 가져다 교수들에게 나눠 주었어요. 원서수입상도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학술진흥을 위해서 한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고.
“6‧25 때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갔고 이승만‧프란체스카 내외가 부산 부민동의 경남도지사 관저에 기거했어요. 나는 영국대사관에서 일하며 저녁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가끔 차를 마시기도 했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나에게 이 대통령 말동무를 해드리라고 해 런던에서 일부러 구입한 ‘조크 북’의 내용을 열심히 읽어 대통령에게 들려주었어요. 서울 수복 후 프란체스카 여사가 ‘고맙다’며 일본 고관이 살던 적산가옥을 나에게 주었어요.”
-노인복지에 가장 신경을 쓴 대통령이라면.
“노인복지 문제로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만났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노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제대로 이해해주었어요. 경로연금을 주어야 한다고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졸랐지만 실제로 해준 건 DJ였어요.”
-이 심 전 대한노인회장과도 일한 것으로 안다.
“회장 고문역으로서 노인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 교환을 했어요. 이 심 회장은 노인회를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시켜 사회적인 위상을 높여놓았어요. 일자리, 의식변화, 각종 노인복지정책 등에 기여한 공로도 자타가 인정합니다.”
-생전에 노인인구가 700만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나.
“그럼요. 서구사회의 변화와 후진국의 빠른 발전 속도를 보고 짐작을 했어요.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 체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잘 돼 있어요. 노인들이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장수해요(웃음).”
-노인 빈곤‧자살률을 줄이는 비책은.
“우리나라는 노인에 대한 소득보장이 안 돼 있어요. 잘 갖추어진 의료보험 덕에 오래 살게는 됐지만 편안한 노후를 보내기는 힘든 언밸런스(불균형)한 사회입니다. 생활고가 자살 이유 중 하나이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가 구석구석 잘 살펴서 대책을 세워주어야 해요.”
-한 세기를 살아보니 어떤가.
“‘인생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인, 사업가들은 감투 쓰려고, 돈 많이 벌려고 사람 못살게 굴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가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살면서 어느 때가 가장 좋았나.
“45세 무렵(한국노인문제연구소장 재직) 매스컴에서 날 알아주고 불러줄 때가 좋았어요. 노인복지정책 개발을 사명의식을 갖고 했을 때였거든요.”
-‘백세시대’ 신문에 하고 싶은 말은.
“고령후기노인을 위한 건강기사를 좀 더 많이 실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노인병원, 요양원이 9500여개소가 있어요. 거기에 종사하는 인원이 10만명이 넘어요, 그들의 직업과 관련된 정보나 지식도 게재함으로써 독자층의 외연을 넓혀야 해요.”
글‧사진=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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